김인규 사장이 심각한 구설수에 올랐다. 내부에서 벌써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요구가 터져 나온다. 외부의 여론도 만만찮다. 좀 더 지켜볼 일이지만, 사실로 밝혀진다면 당장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장의 교체에 그치지 않는다. 낙하산 방식의 사장 선임 방식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구태이자 기득권 덩어리인 노조는? 무력한 이사회와 무능한 시청자위원회는? 자율성과 거리 먼 프로그램 제작과 편성의 규칙은? 공영방송 서비스에 대한 가치, 정신의 문제는? 이런 문제 전반을 완전하게 뜯어 고치지 않으면 안 되고, 이제 우리는 이런 문제의 총체적 해결을 위해 지혜를 짜내야 할 것이다. KBS 레짐의 민주적 교체 작업이다.

수 십 년간 정치적 쟁투를 통해 획득한 역사적 산물인 공영방송 제도를 꼭 지켜야 한다. 신자유주의 자본/국가의 집요한 파괴공작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영방송 KBS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맞다. 만약 이 두 가지 생각을 공유한다면, KBS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불량한 현 레짐의 변화에 당장 나서야 한다. 방송사 내부 구성원들이건 일반 시청자 대중이건 구별 없는 공동의 선택이다. 비판적 시민사회운동진영이건 혹은 보수적 정치세력이건 상관없이 나설 공통된 사명이다. 논란이 된 사장의 문제를 포함해, KBS 전반의 운용규칙과 규제틀, 가치양식 등을 전면적으로 재 디자인하는 범사회적 창의사업을 당장 추진해야 하는 것이다.

▲ 김인규 KBS 사장 취임 사진 ⓒ KBS
KBS의 모습이 말 그대로 가관이다. 하기야 새삼스러운 일은 전혀 아니다. 한심한 모습, 용인할 수 없는 작태는 이미 오래전부터 계속되었다. 민주적 공적영역으로서의 정치적 정당성은 바닥으로 떨어진지 꽤 오래되고, 공영방송으로서의 대중적 신뢰성도 찾아보기 힘든 지경이 되어 버린 지 한참 되었다. 냉정하게 말해 지난 정권 때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볼 수 없지만, 현 정권 들어 KBS는 속된 말로 완전히 망가졌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영방송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 스스로 내세우는 ‘국가기간방송’ 혹은 ‘국민을 위한 방송’으로서의 자존심, 체면을 구겨버렸다. 무리수에 따른 필연적 결과다. 그렇지 않다고 믿는 KBS 내부자가 있다면 공개적으로 지면을 통해 논쟁해 보자.

정확하게, 가관인 게 뭐고 망가진 게 무엇인가? 공영방송으로서 역사적 책무가 망가졌으며, 국영방송의 모습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척하며 공영방송이라 떠벌이는 모습이 가관이다. 요컨대 시청자들 사이 신뢰성과 정당성이 붕괴되어 버렸다. 현재의 KBS는 사회적 공통이익의 실현과 보호를 위해 성실하게 역할을 다하는 정당한 공적서비스 기관인가? 사람들은 지금의 KBS에 대해, 정치권력 등 제 권력에 대한 사회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규제의지와 함께하는 자유로운 공영방송사라는 신뢰를 갖고 있는가? 정권이 아닌 시청자의 편, 권력이 아닌 시민들의 입장인가? 그렇지 않다. 의심스럽다면, 당장 그 ‘과학적’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해 보라.

더욱 심각한 문제는 수습할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적당한 감을 갖고 살길을 찾으려는 조짐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럴 의사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태는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고 있다. 2009년과 2010년이, 2010년 초와 말이 많이 다르다. 사람들의 태도는 분노와 절망에서 냉소와 회의로 치닫는다. 이런 식이라면 2011년에는 또 어떨지 안 봐도 뻔하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동정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시대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하고 무능력한 도구적 채널로 굳어져 버렸다. 눈치껏 대세를 살피고 요령껏 대의를 따르며, 그래서 상황 변화에 맞춰 적당히 변신하는 임기응변의 기본기조차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위기관리능력의 구조적 부재.

소외와 고립이 그 결정적 망조다. KBS는 그런 가소로운 존재, 어처구니없는 상대다. 따라서 정치권력을 위해 서비스하면 할수록 대중들의 공분만 불러일으킬 뿐이고 시청자들로부터 한심하다는 질타만 받게 될 것이다. 선전채널로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에, 아무리 해도 정권에 도움 되지 않고 스스로의 위상만 갉아먹는다. 이런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읽지 못한다. 그러니 정권 초기 ‘좌파척결’의 무단적 공안통치가 횡횡하고 전 사회를 위축시킨 공포의 치안스테이트가 계속될 때의 모습을 반복한다. 효력 없는 전쟁공포를 부추기고, 명백한 진실의 저널리즘조차 검열·차단하려 들며, KBS의 양심회복을 외치는 내부 소수자자들을 징계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이러니 정말 가관이라 할 수밖에 없잖은가?

▲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가 8일 정오, 서울 여의도 KBS본관 1층 민주광장에서 개최한 ‘추적60분 방송보류 규탄대회'에서 조합원들이 '4대강이 성역인가, 추적60분 방송하라' '청와대 눈치보기, 김인규는 허수아비' '추적60분 방송보류, 정치간부 물러나라' 등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곽상아
힘 있는 자에게 빌붙어 못된 짓하는 버릇 고치라고 시청자들은 계속해 경고했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냈다. 이런 대중들의 지시를 무시하면서 위태롭게 질주한다. 과연 그래서 살아남을 수 없는 자는 누굴까? 눈치도 없이 자기 정체 부정의 길로만 달려가는 KBS가 먼저 처참하게 망가지지 않겠는가? 다시 기어 나올 수 없는 죽음의 낭떠러지가 바로 저 앞인데. 그런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정신없이 내달리겠다는 건가? 대체 KBS기관의 브레이크는 완전히 파열된 상태란 말인가? 민주주의 대로에서 역주행을 즐기는 정신 나간 드라이버는 누가 단속할 것인가? 치명적 결함이 발견된 운전사를 저리 내버려두고 사회의 안녕을 기할 수 있겠는가?

제도의 보존과 사회의 안녕을 위해 운행 규칙, 가치 등을 안전하게 바꿔야 한다. 공영방송 KBS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국영방송으로 돌아가길 기대하는 세력과 상업방송으로 바뀌길 욕망하는 집단이 실재한다. ‘KBS=공영방송'이라는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보장된 것도 아니다. KBS 공영방송은 정권홍보채널로서의 기능을 원하는 정치권력과 상업시장의 확대를 위해 탈취코자 하는 자본·미디어권력의 양동작전 하에서, 치열하게 이론 또는 철학적으로 교전하면서 만들어내고 복구하는 한 존재 가능할 따름이다. 재구축하지 않는 한 지속될 수 없는 제도다. 내부의 의지와 외부의 의사가 튼실하게 맺어지면서 상부의 비민주적 의도를 논리적으로 제압할 때 가능한 모델이 바로 공영방송이다.

KBS가 공영방송으로 남길 바란다면, 공영방송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고 공영방송의 규칙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앙시엥 레짐의 거부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사회의 보호, 공익의 보존을 위해 마땅한 결정이다. 문제는 비판과 거부에 그치지 않는 대안 생성과 제출의 책무다. 우리의 숙제다. 외부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내부적으로 민주적이며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는 새로운 KBS 레짐의 설계도 작성. 조직화된 반공영 세력에 대항해 우리가 취할 가장 시급하고 현실적인 공영방송제도 보존의 정치 프로젝트다. 제도로서의 공영방송, 공영방송으로서의 KBS를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반사회적인 불량 레짐을 전면적으로 바꿔내야 한다. 사장 교체보다 훨씬 힘들고 더 중요한, 공영방송의 미래가 걸린 한해의 결정적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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