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다시 있어서는 안될 사고가 일어났다. 피해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유람선 야경 관광이 이렇게 위험천만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에 계속해서 놀라게 된다. 이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의 악몽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이 정치적 시비거리의 차원에서만 생각되는 모양이다.

청와대가 얼마나 신속하게 대응했는가를 묻는 질문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국외에서 일어난 사고라고 해도 우리 국민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니 만큼 청와대의 적절한 대응 여부는 꼭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이를 다룬 기사에서 가장 먼저 찾아볼 수 있는 댓글 반응은 이 정권도 늑장대응하고 대통령 동선을 공개하는 것에 소극적이면서 왜 이전 정권에 대해서는 그토록 모질게 대했느냐는 것이다.

정치적 냉소주의는 많은 경우에 같지 않은 것을 같다고 전제한 후 왜 양자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느냐는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 불공평한 처사의 배경에는 늘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 이번 사고에 대해 제기하고 싶어하는 의문은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결국 전임 대통령 탄핵을 위해 세월호 참사를 이용한 것 아니냐는 거다.

박근혜 정권에서 이른바 ‘세월호 7시간’ 미스터리는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회에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대통령이 집무실에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 위치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한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문제제기는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 국정농단의 실체에 가 닿고야 말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시에도 관저에서 최순실 씨와 문고리 비서관들과만 대책을 논했던 것이다.

당시 대통령의 위치가 참사라는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서 대통령이 ‘골든타임’에 적절한 구조 지시를 내렸다면 상당한 수의 희생자들이 구조될 수 있었으리라는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세월호 7시간 미스터리’라는 문제에 접근해서 우리가 얻으려 했던 것은 진상규명을 통한 재발방지에 핵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 머르기트 다리 앞에 30일 오후(현지시간) 추모객 등 현지 주민과 관광객들이 놓아둔 촛불과 꽃이 사고 현장을 향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이런 차원에서 같은 질문을 문재인 정권의 대응에도 물론 던질 수 있다. 청와대가 밝힌 바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다. 사고는 한국시간으로 30일 오전 4시 5분 쯤 일어났다. 부다페스트 현지 공관은 사고 발생 약 1시간이 지난 시점에 상황을 인지했다. 오전 5시 10분에 주 헝가리 대사에게 이 사실이 보고됐고 현지의 비상대책반이 가동됐다. 5시 45분에는 해외안전기획관실과 청와대 위기관리센터 등 관련 기관에 상황이 공유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첫 지시는 오전 8시에 이뤄졌다. 가용한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 구조활동에 진력하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본부장으로 해 중대본을 구성하며 헝가리 현지에 신속 대응팀을 파견하라는 내용이다. 구체적인 방침이 포함됐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점까지 고려하면 청와대의 대응에는 적어도 신속함이라는 기준에 있어서는 딱히 문제라고 말할 대목을 찾기 어렵다. 청와대가 밝힌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물론 보수언론은 여전히 삐딱한 태도이다. 조선일보는 31일자 지면 기사에서 “청와대는 이날 문 대통령 지시 사항들을 여섯 번에 걸쳐 공개했다”며 “청와대는 세월호 사고 때 문제가 됐던 ‘대통령 보고 시점’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썼다.

언론이 청와대의 태도를 결과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청와대가 그렇게 반응하게 된 핵심 이유 중 하나는 앞서 언급한 “이건 되고 왜 이건 안 되느냐”는 식으로 묻는 언론을 의식해서이고, 이런 문법을 가장 즐겨 사용하는 신문이 바로 조선일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예를 들면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국가채무비율 40%가 마지노선이라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은 것에 대해 조선일보는 20일 사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 대표일 때는 국가채무비율 40%를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으로 묘사했다며 “앞뒤 발언이 같은 사람 머릿속에서 나온 게 맞나 싶다. 의도는 뻔하다. 선거용 세금 퍼붓기에 방해가 될 요소를 미리 제거하려는 것”이라고 썼다. 과거와 현재의 발언이 다른 이유에는 여러 맥락이 있을 수 있는데 “의도가 불순하다”는 결론으로 바로 점프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과 외교부 공무원의 정상 간 대화 누설 논란과 관련해서도 드러난다. 조선일보는 25일 사설에서 정청래 전 의원이 과거 방송에서 양국 대통령 대화 내용을 언급한 사실을 거론하며 “이번 일과 뭐가 다른가”, “검찰이 거의 매일 확정되지도 않은 피의사실을 공표해 법을 어기고 인권을 짓밟는 것은 방관하는 정부의 내로남불도 이해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라고 썼다. 하지만 이미 공개된 내용을 과장해서 방송에서 전한 것과 주미대사관 참사관에게 기밀을 누설하도록 하고 이 내용을 공개한 행위는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조선일보 뿐만이 아니라 대다수 언론과 정치세력이 이런 간편한 도식을 애용한다.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최근에는 이런 태도가 포퓰리즘적 압력의 동력이 되고 있다. “기성정치는 썩었다”면서 한쪽에선 “우리끼리라도 살아남자”는 각자도생의 논리를 내세우는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또 다른 한쪽에선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포퓰리즘으로서의 엘리트주의가 이에 대항하는, 기묘한 구도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현상이 참사를 소재로 해서 다시 한 번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떤 인간성의 상실을 목도한다. 묻고, 따지고, 문제제기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언론과 정치가 자기 역할을 신실하고 치열하게, 똑바로 하자는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