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있다. 5.18 기념식에서 있었던 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권의 입씨름과 언론의 적극적 훈수를 보니 이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보수언론은 문재인 대통령이 5.18 기념사를 통해 “아직도 5.18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망언들이 거리낌 없이 큰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는 현실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부끄럽다”며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자유한국당의 ‘좌파독재’ 등 비판에 대응한 것이며 지지층 결집용 발언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럼 이제 이런 해석이 맞는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

과연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좌파독재’라는 자유한국당의 주장에 대응한 것일까? 자유한국당의 ‘독재자’란 표현에 대해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KBS가 자사의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을 통해 그야말로 자해적인 평가를 내린 문제의 대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주년 대담에서 ‘독재’라는 규정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여야 간 대립 상황에서 나오는 정치적 표현으로 본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즉, 여기서 자유한국당의 ‘독재자’ 표현은 정치게임의 영역 안에 있다.

그런데, 이런 차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독재자의 후예”란 말을 쓰면 결집하는 것은 더불어민주당 지지자일까, 자유한국당 지지자일까? 결과적으로는 양쪽 모두 결집하게 되겠지만 단기적으로 본다면 당연히 후자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 ‘외부의 적’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지자들이 결집하면 그렇잖아도 장외투쟁을 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유연한 행보를 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런데 정부 여당은 추경안 통과 등을 위해 국회에서 제1야당이 협조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정치공학’으로 이해득실을 따져 본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함으로써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의 “독재자의 후예” 발언은 ‘좌파독재’ 등에 대응하는 정치게임의 차원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이해득실의 문제를 떠나 대통령이 스스로 이 시점에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라고 판단했다는 게 합리적인 추론일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광주를 내년에 찾을까 고민했지만 올해 굳이 왔다고 말하는가 하면 “너무나 미안하다”며 10초 넘게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음모론을 제기하고 이를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소재로 이용하는 시도가 다양한 수단을 통해 확산되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즉, 대통령은 정치게임의 차원을 벗어나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자유한국당이 “독재자의 후예”란 말은 자신들을 겨냥한 것이라며 반발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자유한국당이 굳이 ‘선출된 권력’이 아닌 김정숙 여사가 황교안 대표와 악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의 수위를 높이는 것은 이 사태를 지지층의 결집도를 완화시키지 않는 기회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유시민 이사장의 지령에 따른 행동”이라고 주장한 것은 대권주자들끼리의 경쟁구도를 만드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악수에 대해 말하자면, 문재인 대통령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악수를 나누며 “잘 오셨다”고 얘기했고 황교안 대표도 이에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악수’에 있어서 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김정숙 여사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장면이다.

여기서 함께 주목할 것은 황교안 대표의 광주 방문 효과이다. 황교안 대표는 강한 반발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5.18 기념식에 참석해 곤란한 상황에 스스로를 노출시켰다. 이른바 ‘5.18 망언’ 당사자들의 징계를 마무리하지 않은 상태로 광주를 방문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 대목에서 황교안 대표와 자유한국당은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18일 오전 제39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시민들의 항의를 받으며 행사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이 같은 맥락은 일단 제쳐놓고 제1야당 대표의 5.18 기념식 참석이라는 점만 놓고 보면 황교안 대표가 광주를 방문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명분이 있는 행동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른 것도 마찬가지다. 여러 미흡한 점이 있고 비판이 예상되더라도 공당, 특히 제1야당의 대표라면 5.18 기념식에 참석해 나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자유한국당의 극우적 지지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렇잖아도 황교안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수형생활에 협조적이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일부 극단적 세력들의 비토를 받은 바 있다. 제1야당의 대표로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을 한 것인데도 오히려 지지층의 분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고 광주를 비롯해 호남에 대한 ‘스킨십’을 포기할 수도 없다. ‘황교안’이라는 간판으로 총선을 치러내고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더 튼튼히 해야 하기 위해서는 겪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의 이해할 수 없는 트집잡기는 바로 이런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기념사로 편을 가르고 국민 통합을 저해했다기보다는 그 반대인 것이다. 이런 일들은 총선을 향하는 과정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박근혜 전 대통령 문제이다. 벌써 신동아나 시사저널 등의 보도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평가 문제가 다시 대두된 상황이다.

자유한국당이 이런 혼란 속에서 극단적 행보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국정농단으로부터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분리하지 못하면서 자초한 것이다. 이런 행보는 단기적으로 반사이익을 거두면서 지지층의 단결을 유도하는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건 결국 정치적 핵심요소에 대한 평가를 유예 및 회피하고 존재하는 갈등을 그저 봉합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미봉적으로 유지해 온 지지층의 균열은 언젠가 파국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때가 황교안 대표의 자유한국당이 진정으로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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