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에 따르면, 1997년 당시 안기부는 한겨레를 ‘친북 좌익세력 지원 언론’으로 규정, “정부부처 및 산하 정부투자기관에 한겨레신문 광고를 중단하도록 하고, 전경련 등과 협조해 대기업 광고가 점진적으로 줄어들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실제로 대기업 광고가 눈에 띄게 줄었고, 예약된 광고가 최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안기부법 개악 비판 기사가 이유였던 것 같은데, 한겨레가 ’안기부 대해부‘ 시리즈를 통해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해약 사태는 진정되었다고 한다. 10년의 시간이 흘러, 한겨레는 2007년 11월 2일 ’회장 지시 사항‘ 삼성그룹 내부 문건을 입수 공개한다. “한겨레신문이 삼성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쓴 기사를 스크랩해 다른 신문이 보도한 것과 비교해 보여주고, 이것을 근거로 광고도 조정하는 것을 검토”(2003년 10월 18일)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 한겨레신문사 사옥ⓒ한겨레
이를 입증하듯,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관련 기자회견이 보도된 직후부터 삼성은 한겨레에 광고를 주지 않았다. 경향신문과 함께였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함세웅 신부는 ‘21세기 신종 광고탄압’이라고 비판했다. 민언련은 “광고를 무기 삼아 비판언론을 손보는 삼성의 언론 통제가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면서, 삼성은 광고탄압을 즉각 중지하라고 주장했다. 몇몇 언론단체들이 삼성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구동성으로 한국최대 재벌이 광고를 내세워 언론을 장악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삼성은 경향과 한겨레에 대한 광고 탄압을 당장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삼성의 ‘사적보복’을 비판했다. 한겨레 김종구 편집국장은 “건전한 비판마저도 불온시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그 옹졸함과 편협함이 씁쓸할 뿐이다”라고 적었다.

맞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신문들을 광고로 길들이려 하는 참으로 오만한 자본이다. 그런 재벌을 규탄하는 심정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떠든다고 삼성이 고분고분 들어주겠는가? 김 국장의 말대로, “자본이 자기 돈 자기 마음대로 쓴다는 데야 뭐라 말하겠냐.” 삼성중공업 사과 광고조차 한겨레만 쏙 빼는 삼성이다. 과거 안기부와 달리 한겨레가 확 바뀌지 않은 한, 쉽게 광고를 줄 것 같지 않다. ‘광고중단’이나 ‘광고조정’도 아니고, 단지 “부정적인 기사가 나오는데 광고를 실어봐야 효과가 없다고 판단된다”는 삼성관계자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뒤집으면, 긍정적 기사가 나오면 광고를 실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비판적 신문에 광고를 주라고 하는 것 자체가 솔직히 어색하고 이상한 모습이다.

▲ 22일 전국단위종합일간지에 일제히 실린 삼성중공업 사과문.
과용하면 치명적인 독약과 같은 게 광고, 특히 재벌광고ㆍ삼성광고다. 자본권력은 광고로써 매체를 지배한다. 원하는 매체를 광고로 지원하고, 원치 않은 매체를 광고로 죽인다. 자본이 광고를 주지 않음으로써 진보매체를 퇴출시키고, 또 광고를 집중시켜줌으로써 독점매체를 강화시킨 미국의 생생한 역사가 있다. “예전 시사저널이 삼성에 대해서도 과감한 기사를 쓸 수 있었던 건 우리 기자들이 유달리 용감하고 정의감이 있어서가 아니거든요. 시사저널의 수익구조가 뒷받침되어서였어요. 판매수익이 광고 비중보다 더 높았거든요. 7:3 정도였죠. 그러니까 재벌에 대해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거죠.” 시사IN 문정우 편집장의 이 말은 한겨레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적용된다. 광고, 무엇보다 삼성광고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삼성 즉 권력의 비판은 광고지배로부터의 독립 없이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진정 흔들림 없이 제 길을 가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삼성과 재벌 광고를 더 할 게 아니라, 애당초 광고에 대한 의존도를 훨씬 낮추는 거다. 한국 신문의 광고를 통한 자본 종속은 한마디로 비정상의 수준에 이르렀다. 일간지들은 수입의 90% 정도를 광고에 의존하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현상을 보이고 있다. 2004년 3월 7일자 한겨레도 ‘낮은 구독료와 높은 광고수익 비율로 대변되는 한국 신문의 비정상적 구조’를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한겨레는 어떠한가? 2003년 민언련 조사에 따르면, 한겨레의 지면 중 광고 비율은 42%로 나타났다. 60%의 조중동과 비교하면 낮지만, 경향신문의 35%보다는 높은 수치였다. 르몽드의 14%보다는 3배가 많았고, 일본에서 광고비율이 가장 높은 아사히의 47%와 비슷했다.

▲ 12월 28일 전경련회관, 삼성 이건희 회장ⓒ민중의 소리

한겨레 또한 광고가 주 수입원이며, 전체 광고 중 약 10%가 삼성광고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800명에 이르는 식구들이 광고 덕택에 먹고 사는 구조다. 바로 이 기형체질을 개선하자는 것이다. 한겨레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재벌, 삼성 광고로부터의 독립으로 실현하자는 것이다. 삼성에게 광고를 달라고 조르는 게 아니라, 광고의 유혹으로부터 멀찌감치 도망치는 거다. 이렇게 항의할 것이다. 광고를 줄이면,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살란 말인가? ‘신문의 죽음’이 공공연히 이야기되고, 인터넷 등 새로운 매체에게 기존 독자층을 빼앗기고 있는 상황에서, 재벌ㆍ삼성 광고 외부에서 대안을 찾자는 게 헛된 망상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냉정하게 현실을 살펴보고 외국의 사례를 돌아보면, 광고 비중을 줄이는 것만이 진보지로서의 선택이라는 해답이 나온다.

신자유주의 자본국가의 등장, 일방적 자본권력의 완성, 규제 철폐적 미디어 환경의 변환은 한겨레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살림의 설계를 요구한다. 경향신문도 마찬가지다. 광고 의존도를 줄임으로써 자본과의 교전 폭을 늘리고, 비판적 저널리즘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 다중의 신임을 획득하며, 진보적ㆍ비판적 신문의 존재감을 체감한 이들에게서 튼실하고 선한 돈줄을 찾아야 한다. 권력의 선전을 견제하면서 인ㆍ민의 언론을 보호하고, 그럼으로써 독자의 후원을 얻어내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표현의 자유, 공론의 장을 지키고자 분투하는 가난한 매체를 결코 독자들은 버리지 않는다. 광고로부터 일찌감치 독립했기에 자본을 자유롭게 비판하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존속에 기여한 외국의 진보신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 한겨레 1월23일자 2면에 실린 광고.

광고축소의 비상한 상황을 오히려 변신의 계기로 삼는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발상이 절실하다. 어떻게 구독료를 올리고, 어떻게 독자층을 배가하며, 또 어떻게 진보의 필요에 맞게 지면개편을 해낼 것인가? 제작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재의 약탈적 저가경쟁구조, 비상식적 덤핑구조를 한겨레가 어떻게 먼저 타파하고 나설 것인가? 진보적 저널리즘의 질을 어떻게 담보해내고, 독자의 실질적 참여를 어떻게 실현시키며, 비판적 신문을 어떻게 미디어 공공성의 일축으로 재전유ㆍ재배치할 것인가? 이러한 사업에 외부 시민사회ㆍ운동진영의 부담이 없을 수 없다. 한겨레를 경향신문과 더불어 자본ㆍ광고의 봉쇄망으로부터 구출할 뾰족한 계획, 실행의 프로그램을 함께 설계ㆍ고안해 내는 것이다. 공영방송을 지키는 게 옳듯이, 비판신문을 살리는 게 맞다. 그 살 길의 마련이 급하다.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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