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야 알았지만 해리 포터 1편이 개봉하고 무려 10년이 흘렀습니다. 원작을 몰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가 싶어 극장의 맨 앞에 앉아 힘겹게 관람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한데 말입니다. 하긴 굳이 시간의 흐름을 수식화하지 않더라도 주인공들의 외모가 충분히 시각화해주고 있긴 하죠. 저도 그렇고 배우들도 그렇고, 해리 포터와 함께 성장한 셈입니다.

다시 잠깐 10년 전으로 돌아가 볼까요? 저는 영화라면 닥치는 대로 보지만 유독 판타지와 뮤지컬 장르에는 흥미가 떨어졌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처음 영화를 좋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습니다. 그러다 <맘마미아>가 뮤지컬 영화 최초로 제게 격한 재미를 안겨줬고, 이보다 조금 앞서 <반지의 제왕>이 판타지 영화에서 동일한 감격을 제공했습니다.

<반지의 제왕>이 개봉했던 2001년은 판타지의 양대산맥이 나란히 개봉했던 해입니다. 또 하나는 다들 잘 아시다시피 <해리 포터>죠. 하지만 전자가 제게 판타지 영화의 묘미를 안겨준 데 반해 후자는 원작의 명성이 무색할 만큼 지루했습니다. 그때 내린 결론이 이랬습니다. "해리 포터는 아동용 영화군" 어쨌거나 매번 속편이 개봉할 때마다 극장에서 꾸역꾸역 관람한 게 이상할 따름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시리즈 영화의 폐단(?) 탓에 한번 보기 시작했으니 끝장을 보려던 것도 있었으나, <해리 포터>는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더라는 거죠.

그렇게 고조되어 가던 흥미가 2007년에 개봉한 <불사조 기사단>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습니다. <불사조 기사단>을 보면서는 깜짝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해리 포터보다 더 맘에 들었던 포스의 소유자 케드릭이 죽는 걸 보곤 거의 아연실색했어요. 결국 그 후에 <해리 포터> 시리즈에 대한 결론을 바꿨습니다. "이건 절대 아동용이 아니야!"

덕분에 제 기대는 점점 커졌습니다. 사실 마법이나 부리는 동화 같은 장난을 보느니 이 편이 몇 배는 더 흥미진진한 것은 사실이죠. 적어도 성인관객에게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기대를 무참히 짓밟은 시리즈가 있었으니, 범인은 작년에 개봉했던 <혼혈왕자>입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로는 유례없이 제가 개봉을 기다리며 관심을 가졌으나 그에 비례하는 실망을 안겨주더군요. 스틸 컷과 예고편을 공개할 때만 해도 암울하기 그지없을 듯하여 초미의 관심을 유발하더니... 소위 말하는 "예고편이 전부?"라는 속설이 <혼혈왕자>에도 그대로 통용되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이 타격으로 인해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에게는 다시 관심이 떨어졌었습니다. 전편도 시리즈의 최종장을 위한 분위기 조성차원에서 끝났으니 두 편으로 나뉜 이야기는 더할 것이 뻔해 보였죠. 게다가 감독도 교체하지 않고 계속 간다니 기대할 만한 구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은 이런 선입견을 초반에 뒤집어 엎었습니다.

주인공 삼인방이 볼트모트로부터 피신하는 도입부에는 차라리 비장미마저 서려 있습니다. 급기야 헤르미온느는... 아무튼 확신할 순 없지만 시리즈 중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만큼 앞으로 다가올 전운을 짙게 그린 프롤로그는 없을 겁니다. 이 자체가 차후 펼쳐질 이야기의 성향을 짧게 요약하면서 발단의 역할을 하는 데 훌륭하게 쓰였습니다. 이를테면 관객에게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걸?"이라고 말하며 한껏 기대를 부풀게 만듭니다.

정확히 말해 오프닝부터 위즐리의 집으로 피신하는 과정까지 본 소감을 표현하자면, 과장을 좀 보태서 '판타지계의 다크 나이트'쯤 될 줄 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도입부의 느낌은 <다크 나이트>를 볼 때와 흡사했습니다. 비웃을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가 <해리 포터>를 보며 전율을 느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시리즈 특유의 유머가 난입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어둡고 진지하며, <불사조 기사단>의 그 데이빗 예이츠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연출이 좋았습니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도 제 몫을 톡톡히 합니다. 특히 지상과 공중을 오가는 추격전의 완성도가 꽤 훌륭합니다.

다만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은 어디까지나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한 편의 영화에서 끝을 내지 않고 1, 2부로 나눈 만큼 이야기의 분절은 감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긴장감을 이 한편에서 유지하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번 편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맺어진 하나의 이야기를 둘로 나눴습니다. 이것은 이전까지 <해리 포터> 시리즈가 취하던 방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해리 포터>의 원작은 총 일곱 권으로 구성됐습니다. 이 일곱 권이 모두 모여 종국에는 하나의 큰 이야기(해리 포터 연대기?)를 완성합니다. 그러니까 총 일곱 권의 책이 <해리 포터> 시리즈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각 권의 책들도 저마다 개별적으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티비 드라마를 떠올리시면 이해하기 한결 쉬우실 겁니다)

지금까지는 그랬지만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은 다릅니다. 이전과는 달리 한 권의 책을 둘로 나눠 촬영하다 보니 좀 심심한 구간이 없지 않습니다.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구성의 5단계를 세 번이나 쪼개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겠죠. 그래서인지 극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크룩스를 찾아 떠난 여정은 초반부의 긴장감과 흡입력을 거의 살리지 못합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은 원작의 발단에서 출발해 전개에서 끝나니까요.

반면에 이로 인해 생기는 이점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원작을 모태로 한 영화가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불가피한 운명, 즉 러닝타임의 한계에서 훨씬 자유롭습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지금껏 가장 많이 지적받은 것 중의 하나가 원작의 지나친 축소임을 감안하면 이건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에게 축복이나 다름없습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세세한 묘사를 덧붙인 부작용도 보여 러닝타임을 허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했습니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은 한 편의 영화로 기능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편의 흥을 돋우기 위한 서곡으로는 비교적 훌륭합니다. 결말부에 이르면 2부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할도 하고 있고요. 무엇보다 후편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시리즈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은 본분에 충실합니다.

덧1) 주인공 삼인방은 이제 성인의 티가 물씬 풍기더군요. 해리는 거뭇거뭇한 수염까지 보이고, 론은 운동을 했는지 체구가 꽤 커졌어요. 헤르미온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바야흐로 여인의 향기에 취하게 만듭니다... 네가 여자로 보일 줄이야!

덧2) 요정답지 않은 요정(?) 도리를 주목하세요. 정말 의외의 활약이었습니다. 근데 그의 비중이 원작에서도 크나요?

덧3) 헬레나 본헴 카터는 이번에 거의 엑스트라급이지만, 그 미친 존재감이란... 조연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덧4) 맘에 드는 남자에게 등이 훤히 보이는 드레스의 지퍼를 올려달라고 하는 건 머글계나 마법계나 똑같더군요 ㅋㅋ

덧5) 제가 이토록 <해리 포터>의 개봉을 기다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앞으로 대략 7개월이나 남았네요. ㅠ_ㅠ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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