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살아있는 족벌언론권력의 상징

22일 저녁 80회 생일(傘壽)을 맞아 롯데호텔에서 자신의 두 번째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출판기념회를 연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살아있는 언론권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의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방우영은 누구인가? 우선 조선닷컴에 올라 있는 그에 관한 인물정보를 보자.

1928년 1월 22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일민(逸民). 서울 경신중학교와 연희전문 상과(지금의 연세대 상대)를 졸업하고, 중앙대 명예법학 박사, 연세대 명예문학 박사 그리고 인제대 명예경영학 박사를 받았다.

조선일보에는 1952년 공무국 견습생으로 입사, 35살이던 1962년 상무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한 뒤 조선일보의 대표이사 사장과 회장을 지냈다.

중앙문화학원(중앙대) 이사장, 한국언론연구원 초대 이사장, 대우그룹 재단이사, 서울·한양컨트리클럽 이사장, 연세대 동문회장 세차례, 한독협회 회장과 대한골프협회 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방일영문화재단 이사, 고당 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연세대 재단 이사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 직함도 갖고 있다.

정부로부터 훈장만 4번이나 받아

게다가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만 국민훈장 모란장(1970), 동탑산업훈장(1985), 국민훈장 무궁화장(1992) 그리고 금관문화훈장(1998) 등 4번이다.

관직을 맡지 않은 사람 중에서 방 명예회장만큼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인사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 ⓒ 미디어스

1952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55년 동안 언론인이라기 보다 신문인으로 살아왔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는 방 명예회장은 이 책 서문에서, “나는 일생을 그 일에 바칠 수 있었던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영광으로 삼는다. 그리고 55년의 노력 끝에 모든 조선일보인(人)들과 함께 조선일보를 오늘의 ‘1등 신문’으로 일궈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신문인으로서도 큰 행운아였던 셈이다. 이 책은 그 고마움과 영광을 표현하기 위한 조그마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방 명예회장은 10년 전 출간한 회고록 ‘조선일보와 45년’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조선일보에서 일하는 동안 “재정적 독립없이는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어려웠고 정치권력과 싸우지 않고는 신문을 지켜낼 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사 가족들 입장에서는 방 명예회장의 이같은 술회가 가슴에 와 닿을 법도 하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과거와 오늘을 알고 있는 제3자의 입장에서 방 명예회장의 자랑은 전혀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구차하다.

조선일보 사주들 요정정치 통해 권력자들과 친분 쌓아

조선일보의 역사는 일제 식민지 때에는 적극적인 친일부역으로,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최고 권력자와 실세 측근들과 요정 등을 드나들며 맺은 친분관계를 이용해 살아남은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방 명예회장이 조선일보 대표이사 사장으로 있을 때인 1980년 전두환 소장의 쿠데타 세력이 세운 국가보위입법회의(약칭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위촉된 것도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방일영문화재단이 펴낸, 고 방일영 전 회장의 전기 ‘激浪 六十年, 方一榮과 朝鮮日報’와 방우영 명예회장의 두 회고록 등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요정 드나든 얘기다.

이 전기나 회고록 등에서 이 두 형제가 권력자들과 요정을 드나든 얘기를 읽고 있으면, 그 고백하는 태도가 참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착잡하기도 하다.

회고록 서문, 구차한 변명으로 들려

요정 드나든 얘기, 기생들 머리 얹어준 얘기는 자랑스럽게 공개하면서, 조선일보사의 반민족적 친일부역 행위, 독재권력과의 결탁과 굴종, 비리와 불법·부정 등에 대해서는 왜 솔직히 사과하지 못할까? 용기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수십년 동안 거짓말하며 부인해 온,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이제 와서 인정하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방우영 명예회장이 이번에 출간한 회고록 서문에서 밝힌 아래 내용은 용감하지도 않고 구차한 변명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치권력과 투쟁하는 상황에서 재정적 독립은 더더욱 어려웠던 이율배반의 현실 앞에 때로 좌절하곤 했다. 언론의 자유는 결코 공론(空論)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던 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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