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 원로들과 간담회를 한다는 일정이 공개 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대치국면 변화를 위한 포석으로 봤다. 원로라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을 해보라고 하면 ‘쓴소리’를 할 게 분명했고 거기에는 노선 변화에 대한 주문 등이 포함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여기에 대해 취지에 공감한다 수준의 답을 하면 정국타개책의 발판은 일단 마련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언론 보도를 종합하니 일단 그런 기대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 같다.

대다수의 언론은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등을 토대로 “노선 변화는 없다”는 해석을 이끌어 내고 있다. 언론이 인용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모아보면 그런 해석이 아주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제 적폐수사는 그만하고 통합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한다”면서 “국정농단이나 사법농단이 사실이라면 아주 심각한 반헌법적인 것이므로 타협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또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서도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한데 제대로 활성화돼 있지 않다”고 했다. 남북관계에 대해선 “종북좌파라는 말이 위협적 프레임이 되지 않는 세상만 돼도 우리나라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고 했고 한일관계에 대해선 “일본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면서도 “일본이 역사 문제를 자꾸 국내 정치에 이용하면서 문제가 증폭된다”고 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이른바 ‘적폐수사’를 두고 “살아있는 수사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조선일보 등은 따로 사설까지 써가며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수사를 지시할 때는 적극적으로 하면서 거둘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은 불성실한 답변이라는 취지다. 하지만 대통령이 틀린 말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노선의 변화를 시사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게 보수언론의 시각과 같은 의미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청와대에서 열린 사회원로 초청 오찬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예를 들어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강제징용 피해자 판결 문제를 보자. 사법부가 이미 전범기업들이 배상을 해야 한다는 확정판결을 했기 때문에 이들의 국내 자산 압류나 현금화 등이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이런 상황이 한일관계 악화의 문제를 발생시킨다면 어떤 수단에 의한 것이든 피해자와 일본 기업이 따로 합의를 이루는 수밖에 없다.

2012년만 해도 문제의 기업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하면서도 한국 사법부 판결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판결 이후에는 일본 정부와 긴밀히 상의하며 대응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포괄적 합의에 문을 열어 놓은 것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다. 이런 구도라면 결국 일본 기업들의 배상 등의 합의를 막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둘 중의 하나를 했어야 한다. 첫째는 사법부가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법적인 것 이외의 합의 방식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첫째의 해법은 다시 두 갈래로 나눠진다. 하나는 법리적으로 지금과 같은 판결을 하지 않는 길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이 사법부에 정치적으로 개입해 판결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사법농단 의혹이다. 박근혜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 판결과 관련해서 이런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법리적으로 다른 판결을 이끌어 낼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판결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한 것은 국가 간이 외교보호권이지 개인의 개별 기업에 대한 배상 요구 등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해석은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들어 한국 사법부의 판결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일본도 과거 캐나다를 상대로 동일하게 제기한 바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측면에서 바로 이 사법농단 문제가 사법적인 것 이외의 해결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박근혜 정권과 했던 정치적 약속을 문재인 정부가 어긴 것이다. 문재인 정부 입장에선 바로 그 약속이 ‘사법농단’으로 이어졌으므로 사법부 판결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시도를 쉽게 하기 어렵다. 아베 신조 내각은 바로 이 상황을 “한국이 골대를 옮기고 일본에 영원히 피해를 주기로 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만들어 국내정치적 상황에 이용하고 있다. 이 대목에 있어선 문재인 대통령의 인식이 틀렸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적폐수사’를 중단시킬 수 없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수사기관이 죄가 없는 사람을 수사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간단하게 말해 수사를 해야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사기관이 죄가 있다고 판단하는 대상을 수사하는 것에 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원론을 말한 것이다. 보수언론이 제기하는 나머지 문제는 수사기관이 수사 과정에서 지켜야 할 법이나 절차를 제대로 지켰는지를 따져야 할 문제이거나 단지 정치적 고려사항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보수언론은 이 정부의 ‘경제 실험’ 때문에 성장률이 저하되는 등 치명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대통령은 ‘마이웨이’라고 평했는데, 이것도 올바른 진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경제정책에 있어서 이 정부의 문제는 무언가를 과도하게 했다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충분히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보수언론은 최저임금의 과도한 인상이나 탈원전 정책을 문제 삼고 있지만, 최저임금 인상은 산입범위 조정으로 사실상 후퇴했고 유의미한 정도의 추가 인상은 이제 사실상 없다는 게 기정사실화 돼있다. 탈원전도 장기간에 걸쳐 이루겠다는 정도에서 머물러 있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 전 삼성전자의 화성사업장을 찾아 시스템 반도체 비전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은 이런 사례의 대표적 예이다. 삼성전자가 지금까지의 메모리 반도체 집중 전략을 어떻게 바꾸느냐는 개별 기업의 사정에 불과하다. 대통령이 나서서 이를 뒷받침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것은 과거의 방법론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라고밖에 얘기할 수 없다.

물론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경기 변화에 따라 성장률까지 좌우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엄밀히 말해 산업구조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구조가 확립돼야 하고 제조업 숙련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안전망이 강화돼야 한다. 단기적 차원에서 삼성의 시스템 반도체 비전에 대한 격려와 지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더라도 이러한 대책이 함께 언급돼야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을 피할 수 있는데 그런 시도는 굳이 하지 않고 있다.

초청된 원로 중 한 명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국회의 대치 상황을 풀기 위한 대통령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정권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결단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이런 지적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 전에 확인돼야 할 것은 정부가 무엇에 대한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시간이 갈수록 이게 불분명해지고 있는 이유에는 보수언론이나 관료집단의 저항도 물론 작용할 것이다. 수사권 조정에 대놓고 이견을 표하는 검찰총장의 처신도 이런 모습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물론 정권이 추진하는 수사권 조정이 충분한 수준인가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경찰권력 비대화에 대한 우려와 현재 추진되는 수사권 조정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검찰이 정권을 들이받는 방식으로 불만을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고 실질적 해결책을 마련하면서도 개혁에 대한 비전을 잃지 않는 것은 물론 어렵지만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다. 하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는 것과 미리 의지를 꺾는 것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다른 평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굳이 이런 형식으로 원로들과의 대화 일정을 마련한 것은 어디에 해당하느냐는 것이다. 원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하고 있는지 어떤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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