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과 25일 모처럼 대한민국 국회다운 모습을 보았다. 국회선진화법 이후 국회가 이렇게 다이내믹한 모습을 보여준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마치 고향에 온 기분을 느끼게 했다. 모 의원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국지전’에 국회 상황을 비유하기도 했는데, 특히 25일은 보좌진까지 동원한 그야말로 전면전이었다.

언론은 일제히 ‘동물국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사실 여의도의 ‘동물’들이 긴 겨울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동물’들이 한참 활발히 활동할 때에는 상대 당 의원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기도 했고 회의장 진입 또는 봉쇄를 위해 망치 톱 쇠사슬 등을 동원하기도 했다. '배대 뒤치기'라는 고급 유도기술이 나온 일도 있었다. 국회가 ‘식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전례를 볼 때 아직 ‘동물국회’란 말을 쓰기는 이르니 ‘식충식물국회’ 정도에서 절충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아무튼 이 동물국회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의 감금과 탈출이다. 국회 사개특위의 바른미래당 몫 위원이던 오신환 의원은 기소권을 가진 공수처와 패스트트랙을 거부하다 결국 사임당했다. 바른미래당 지도부가 국회 사무처를 마비시킨 바른정당 출신 인사들을 피해 팩스로 채이배 의원을 보임하도록 하자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몰려가 의원실을 점거해버렸다. 판사 출신이자 국회 법사위원장인 여상규 의원이 웃는 얼굴을 하고 소파로 문을 막은 후 그 자리에 앉는 장면은 정치란 무엇인가란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했다.

채이배 의원은 감금된 6시간 동안 창 밖으로 기자회견을 시도하기도 하고 경찰을 부르기도 했는데 결국 더 큰 사고를 우려했다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철수함에 따라 극적 탈출에 성공했다. 소파 점거에 함께한 자유한국당의 모 의원은 감금도 탈출도 아니고 채이배 의원들과 자신들은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며 마술도 같이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무슨 마술을 했다는 것일까? 과거 위키리크스에 이명박 전 대통령 일파에게 완전히 설득당한 것으로 묘사됐던 공중파 앵커 출신의 모 의원이 첫사랑의 이름을 맞추는 등의 기예를 선보였다는데, 이걸 마술이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다. 그것보다는 채이배 의원의 감금과 탈출 자체를 일단 마술과 같은 일 중 하나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채이배 의원은 풀려나자마자 국회 운영위원장실로 향했는데 여기서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패스트트랙파들이 이후 상황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모양이다. 그런데 바른미래당의 또다른 사개특위원인 권은희 의원이 이미 합의안의 D데이임에도 불구하고 공수처안에 대한 이런 저런 불만을 토로하는 바람에 또 팩스 사보임이 작동했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자유한국당도 근본적 해결책을 고안했다. 국회 사무처 의안과의 팩시밀리를 부숴버린 것이다. 인편도 안 되고 팩스도 안 되고, 패스트트랙 안건은 이메일로 접수됐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접수가 된 걸로 추정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점거를 풀지 않고 있는 자유한국당 등이 이메일 확인을 해야 하는 국회 직원의 컴퓨터 모니터를 봉쇄했기 때문이다. 33년만에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할 정도의 아수라장 속에서 일어난 일이다.

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6일 오전 국회 의안과 앞에서 공직선거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등의 패스트트랙 저지를 위한 국회 농성을 계속중인 의원들과 당직자들을 격려 방문, 구호에 맞춰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자유한국당은 왜 이럴까? 좌파독재니 뭐니 하지만 선거법이 일단 패스트트랙에 진입하면 선거법 개정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판단을 1차적으로 내리고 있는 걸로 보인다. 패스트트랙 동맹들은 자유한국당이 앞으로의 협의 과정에서 의견을 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여기서 ‘의견’이란 선거법을 어쨌든지 개정하는 걸 전제로 한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은 어떤 내용이든 개정을 하면 손해라고 보는 것이다. 지역구를 줄이는 협의가 어렵고 그 과정에서의 의견조율이 다시 당내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각심도 갖고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문제는 패스트트랙을 근거로 범여권 동맹이 형성되면 앞으로의 국회에서 자유한국당은 고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이번 동물국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소리 높여 외치는 자유한국당이 철천지원수나 다름이 없는 유승민 의원 등의 바른정당들과 마치 마술처럼 사이좋게 공동전선을 꾸린 듯 된 것은 큰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지금 들이받지 않으면 총선은 그렇다 쳐도 대선까지 이어지는 동력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판단도 있을 것이다.

이제 동물 각성의 진원지인 바른미래당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내에서 바른정당들이 구박을 당하다 곧 쫓겨날 것처럼 보이지만 냉정히 따지면 이들 입장에서 오히려 상황은 희망적이다. 원래 바른미래당 의원 총 29명 중 바른정당 출신은 8명에 불과했다. 29명 중 한 명은 탈당했고, 한 명은 본인이 바른미래당 소속임을 부정하고 있으며, 두 명은 아예 다른 당에 가서 활동하고 있고, 한 명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당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 지난번 의원총회에서 남은 24명 중 해외 출장을 간 박주선 의원을 제외하고 11대 12라는 스코어가 나온 것이다. 8명에서 3명이나 더 확보를 한 셈이다.

이런 판국에 김관영 원내대표가 패스트트랙을 밀어 붙이면서 11은 권은희 의원 등을 더해 12, 13으로 더 커져가는 분위기다. 특히 애초 8+3에서 3 중 한 사람의 역할을 한 이태규 의원이 “이태규와 상의하라”는 안철수 전 의원의 지침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소한 의원 수준에선 8+3들이 다수파가 돼가는 흐름이다. 물론 또 때가 되면 8과 3은 나눠질 수밖에 없겠지만 일단 반-손학규 김관영 전선 아래에선 당분간 공동행동을 할 걸로 보인다.

이런 환경이라면 조심스럽지만 패스트트랙이 어떤 방식으로든 일단락 될 경우 김관영 원내대표는 사태의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사퇴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어차피 임기도 1달 남짓 밖에 안 남았다. 반대파들의 열을 좀 식히게 하고 판을 다시 짤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서로 당 밖으로 나간다고는 하지 않고 있다.

이 국면이 지나면 여러 국회선진화법 위반 사례에 대해서도 옥신각신하는 상황이 불가피하다. 자유한국당 장제원 의원은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취지로 “모든 것을 걸었다”라고까지 했다는데, 과연 국회선진화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여러 혼란스러운 일들이 회의장이 아닌 국회 사무처 사무실 등에서 일어났고 회의를 직접적으로 방해한 것은 아니라는 방어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두명의 행위라면 모를까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런 식인데 현실적으로 처벌 대상을 가려 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보수언론은 자유한국당 시각에서만 기사 제목을 붙이고 사설을 쓰고 있다. 이것만 보면 범여권과 김관영 원내대표의 부당한 압제에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들이 정의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기 보다는 다들 정치적으로 유리한대로 주장하고 보도하는 것일 뿐일테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성장률은 -0.3%라고 한다. 정부가 제출한 추경안은 충분한 규모가 못 되고 내용적으로도 경기회복에 큰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국회가 이런 식이면 그마저도 언제 처리될 지 알 수 없다. 보수언론 등은 경기가 안 좋다는 신호가 나올 때마다 소득주도성장 때문에 경제가 ‘폭망’했다고 하는데, 경기대응 차원에서 뭔가 해보겠다며 추경이라도 편성하자고 하니 또 국회를 점거하고 부숴버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동물국회의 동물들은 사회적 동물이라기 보다는 권력의 동물인 듯 하다. 권력의 동물 시선에서 보면 동물국회는 모두에게 윈윈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단기적 관점이다. 세계 곳곳을 강타하고 있는 극단주의 정치는 기성정치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결과이다. 살다보면 동물들이 하는 수 없이 날뛰는 때도 있겠으나 하루빨리 마술처럼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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