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치매' 노인이라 하더라도 도시와 농촌, 그 환경에 따라 예후가 달라지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농촌에 사는 분들의 경우, 오랫동안 살아온 공동체에서의 삶과 더불어 평생을 일궈온 '일의 현장'에서 분리되지 않아 치매를 중증으로 악화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도시에서 나이듦이란 퇴직이란 이름의 방출에서부터 삶의 활력소 중 중요한 부분을 잃게 되는 데서 오는 상실감을 짊어져야 한다.

바로 그런 나이듦의 고민에 대해 '도발적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다. 일찍이 가회동 괴짜 할아버지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해 <쓸모 인류- 어른의 쓸모에 대해서 묻다>란 책으로 새로운 '인간형'의 조류를 제시했던, 4월 21일 <SBS 스페셜- 가회동 집사 빈센트, 쓸모 있게 나이 들기>의 빈센트 리가 그 주인공이다.

“집을 디자인하고 짓는 데 걸리는 시간이 1~2년이라면 이후 그 집을 유지하는 시간은 50년이 넘어. 디자인하고 짓는 단계에서 잘만 하면 집은 1백 년도 너끈하게 유지할 수 있지. 집을 부수고 다시 짓는 것보다 지을 때 잘 지어서 오래 사는 게 환경을 위한 일이잖아. 뭐든 한 번 설치해서 영원히 사용하면 공해가 없고 말이야. 친환경 물건을 사고 먹고 쓰는 행위보다 더 사회적이고 실질적인 에코 라이프지”- 그림 그룹과의 인터뷰

100년 살 집을 가꾸는 68세의 청춘

빈센트는 이제 68세, 우리나라로 치면 '한창 노인'이다. 그런데 세다 못해 벗겨진 머리를 뒤로 묶어 꽁지머리로 만들고, 거기에 야구모자를 푹 눌러 쓰고, 날마다 다른 색깔 원색의 옷차림에 컬러풀한 고무신을 챙겨 신은 그의 몸놀림으로 보자면, 350살까지 살 예정인 '한창 청년'이란 그의 말 그대로이다.

이 68세 된 청년의 직업은 '집사'이다. 아내 우노 초이(63)를 모시고 가회동 집을 돌보는 집사. 그의 하루 일과는 아내를 위해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굽는 것부터 시작된다. 달걀, 우유, 물이 1:1:1 비율로 들어간 이른바 '못난이 빵' 팝오버(popover)를 심혈을 기울여 오븐에 구워낸 그는 종을 울려 아내를 깨운다. 잠옷 차림으로 홀처럼 뚫린 가회동 집 복도를 걸어 나온 아내는 기꺼이 집사 빈센트가 만든 빵의 시식자가 된다.

가회동 집 바닥에는 그와 아내가 좋아하는 샴페인 브랜드의 꽃인 아네모네와 환대를 뜻하는 파인애플 문양과 '아폴로니아'란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알바니아의 항구 도시 아폴로니아가 멀리 가회동에 와서 집사 빈센트가 만들고 싶은, 따뜻한 남쪽 유럽의 도시를 상징하는 집의 이름이 되었다.

2년 전 미국에서 은퇴한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을 하는 아내가 이곳에서 한국의 사계절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내와 자신의 지인들의 '소셜 클럽'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집사'의 삶을 자처했다. 그리고 2년 동안 가회동 집을 빌려 지금의 아폴로니아가 될 수 있도록 모든 곳을 그의 손길로 고쳤다.

"제 집에 산다는 건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적 주인으로서 공간을 갖는 거야" -<쓸모 인류>

은퇴한 남자가 개조한 집이라 해서 <자연인>에 나오는 그런 투박한 집을 연상하면 오산이다. 겉에서 보면 한옥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견고한 스테인리스 가구에 보라색, 핑크색 컬러감이 더해진 이국적 디자인의 모던한 공간. 코넬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공대 출신'답게, 하다못해 화분 받침 하나도 단 몇 mm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정밀한 설계도를 통해 안전과 기능성, 거기에 경제성과 아름다움까지 다 갖춘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집사 빈센트가 2년에 걸쳐 만들어낸 곳이다.

환경적 삶의 실천자

보랏빛 마감으로 모던한 화장실. 하지만 살펴보면 물때가 끼지 않게 고려된 높이의 장식장과 인체 공학적으로 가장 편하게 볼일을 볼 수 있는 높이에 마련된 변기부터, 맞은 편 문을 열면 만나게 되는 호텔처럼 잘 접힌 휴지걸이까지 '완벽한 배려'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의 집도 아닌 빌린 집, 그는 소유하지 않지만 ‘누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퇴직이 끝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삶의 마감일 뿐이라 생각한 그는, 아침의 빵굽기부터 시작하여 아기를 낳는 것 빼고 안 하는 것이 없이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돈을 벌어 소비하는 것이 그 삶에서 누리는 최선인 양 생각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우리 몸의 돈이 음식이라던가, 우리 몸을 감싸는 피부가 집이니 돌보고 가꿔야 한다’는 그의 말은 낯설다. 심지어 12000원짜리 화분 받침을 십여만 원을 들여 설계하고 발품을 팔아 만드는, 아니 내 집도 아닌 집을 2년에 걸쳐 공 들여 고치는 그의 삶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고 살아갈 '자본주의적 삶'과는 질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도대체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미국 대기업 항공업체에 입사, 1980년대 미국에서 인종 차별적 대우를 받던 그는 그런 차별에 항의했다가 강제퇴직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여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만 했다. 혼자서 지구와 싸우는 것 같던 그 시절을 견디기 위해 그는 처음으로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가는 그 시간 속에서 자신감을 회복했고, 결국 4년 만에 승소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생각하는 '재산'은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들인 돈이 아니라, 배우면서 스스로 체득해 낸 모든 과정이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내 것이 될, 다른 사람보다 '백배가 아니라 천배'나 더 많고 소중한 재산을 가졌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리고 기꺼이 'just do it!'이라 권한다.

수처작주(隨處作主-서는 자리마다 주인공이 되다)

그런 그의 생각은 집사의 삶을 살아가는 그를 도와주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그의 까다로운 레시피 때문에 고전하는 동네 정육점 사장님에게 그가 만든 요리를 대접하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고, 그의 견고하고 정밀한 장식장을 마련해준 을지로 뒷골목의 기름밥 장인들에게 '친지' 같은 예우를 갖춘다. 그들이 그의 소셜 클럽 아폴로니아의 초대 손님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 도시에서 나이듦의 고민은 치매 이전에, 시간과 일과 돈에 대한 것이다. 그건 결국 늘 자본주의적으로 무언가 소비하기를 강제하는 삶의 궤도에 맞춰가야 하는 고민이다. 바로 그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체제에 대해 집사 빈센트의 삶은 '도발'이고 심지어 '혁명'으로 보인다. 몸과 손을 움직여 쌓은 것이 재산이 되어 가는 새로운 시도, 바로 그런 시도를 빈센트는 'just do it'이라 한다. 그리고 그런 빈센트답게 그는 집사 학교에 대한 도전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