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현대정치의 핵심은 ‘반대’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되었다. 한국 정치도 다르지 않다. 이른바 ‘민주세력’이 동원해 온 프레임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방식, 즉 친일과 독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방점이 찍혀있다. 보수세력이 이에 맞서는 방식은 ‘종북’에 ‘무능’을 연결하는 거였다. 편향적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 이념을 관철하는 데만 혈안이 돼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는 무능을 드러낸다는 논리다.

이명박 정권은 참여정부가 정치개혁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경제적으로는 극단적 이념 추구로 나라를 파탄으로 이끌었다는 편향적 평가에 편승해 등장했다. 박근혜 정권은 이명박 정권이 지나치게 사익추구에만 몰두했다는 문제의식을 복고적인 국가주의적 캐릭터로 수용하면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여기까지는 ‘깨끗하고 실용적이며 유능한 세력’이라는 포장지를 보수세력이 자기 논리로 어떻게든 유지했다.

그러나 국정농단 사건은 이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박근혜 정권은 실용보다는 특정인의 사익을 중요하게 챙기며 스스로 부정부패 재생산 구조의 일부가 됐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권과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과거 민주정부가 배출한 대통령들과 비교해 결코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보수세력의 ‘종북-무능론’은 여기서 붕괴했다. 종북이고 무능이고 간에 누가 정권을 잡아도 이명박 박근혜 두 대통령보다는 낫겠다는 믿음이 자유한국당 지지에서 이른바 ‘중도보수’를 이탈시켰다. 문재인 정권의 탄생은 이 덕분에 가능했다.

이제 우리는 이미 한 번 상영된 영화의 속편을 다시 보고 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나도 속고 당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라며 장외투쟁을 선포한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이 집회에 자신들이 동원한 것은 1만여명 뿐이며 자발적 시민들이 더 참여해 총 2만여명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숫자야 어쨌든 최근까지 다소 자신감을 상실해있던 자유한국당이 모처럼 기지개를 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황교안 대표가 “속았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엄밀히 얘기해서 황교안 대표가 속은 일은 없다. 황교안 대표가 “속았다”고 하려면 최소한 상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돼야 할 것이다. 실제로 황교안 대표는 박근혜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맡던 시절 문자로 해고될 뻔했다. 황교안 대표는 국무총리 외에도 국정농단 정권의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계속 보수진영의 유력 대권주자로 손꼽혀왔다. 이 덕에 정치권에 들어오자마자 자유한국당 대표가 됐다. 이 정권의 무엇에 속을 겨를이 없다.

그럼에도 “속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라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행어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친박’ 정체성을 확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국정농단 정권에 너무나 실망해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초 국정수행 지지율을 올리는 데 역할을 한 ‘중도보수’의 자유한국당 복귀에 심리적 근거를 마련해주겠다는 것이다.

20일 오후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 등이 청와대 방향으로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두 가지 차원의 접근은 ‘보수 빅텐트’라는 정계개편 시나리오로 이어진다. 황교안 대표가 주장하는 정계개편론은 이탈한 중도보수를 다시 데려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탄핵으로 이탈한 일부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세력까지 포괄해야 한다. 따라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구체적으로는 형집행정지)을 주장하면서 ‘정치보복’과 ‘종북’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이런 저런 배려를 하라는 요구는 국정농단의 기억을 불러 일으켜 중도보수층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정권이 경제적으로 무능하다는 평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유한국당의 정권심판 구호에 최저임금 인상이나 탈원전 등이 반복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가 있다. 중도보수층에게 있어서 국정농단은 적어도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경제적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정권의 경제적 무능은 종북세력과 운동권들의 끼리끼리 나눠먹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등장한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문제도 이런 서사의 한복판에 있다. 이미선 헌법재판관이 과도한 주식 보유 등 여러 논란에도 임명 강행된 것은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등 ‘좌파독재’를 더 가속화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중도보수층이 민감해 하는 ‘주식’이라는 자산문제와 ‘종북’을 만나게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시점에 장외투쟁을 선택한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이 모든 흐름을 황교안 대표가 이끌고 있다는 점을 당 내외에 과시한 것이다. 지지율이 거의 왕년의 수준을 회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이런 전략의 효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황교안 대표가 다음 총선의 공천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아직 당 밖에 있지만 복귀가 기정사실화 돼있는 정치인들의 행보도 빨라질 것이다.

그런데 정말 사람들이 황당한 종북-무능론과 이의 연장선인 ‘가짜뉴스’들을 전적으로 믿기 때문에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회복된 것일까? 그렇다기보다는 더 이상 사실 여부는 상관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과장된 논리와 일상적인 거짓말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똑같다”는 믿음이 일반화돼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된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정치 자체의 형식과 구조가 바뀔 때에야 가능하다. 그런데 이에 앞서서 필요한 것은 일종의 대항담론이다. 자유한국당의 색깔론과 가짜뉴스는 거짓에 가깝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다시 말하자면 이 정권이 실제로 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대답을 내놓는 것에 반복적으로 실패한 게 지금 상황을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인사검증 과정에서의 도덕성 제고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권력으로 가진 쪽이 그걸로 무엇을 하겠다는 걸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즉, 문제는 결국 어떤 정치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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