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자랑하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미국여행 중에 그로우만스 차이니즈 시어터에서 <스카이라인>을 관람할 때 나온 첫 예고편이 바로 <워리어스 웨이>였습니다.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우리나라의 배우가 주연한 영화의 예고편을 보게 되니 괜히 뿌듯하더군요. 그만큼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적용될 수밖에 없는 영화가 <워리어스 웨이>입니다.

그건 그거고, 일단 리뷰를 쓰고자 했을 때는 최대한 중립을 지켜야 함이 옳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중립도 결국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취향에 근거하여 내리는 판단일 뿐이지만 말이죠. (따지고 보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부분의 '객관'이란 것도 결국은 자신의 주관에 따른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워리어스 웨이>를 극장에서 만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장동건의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타이틀로 국내에 소개가 됐던 것만도 족히 일 년은 훌쩍 넘었던 시기의 일로 기억합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온라인에서 유출된 예고편을 보면서 영화에 대한 우려가 컸던 게 사실입니다. 이른바 '퓨전'을 내세워 동양의 무사와 서양(미국)의 서부시대를 결합했다는 것은 매력적인 소재임과 동시에 위험천만하게 보였거든요. 제가 학창시절에 지독히도 못했던 과목 중에 하나가 미술입니다만, 서로 다른 색의 물감을 섞게 되면 결과는 둘 중의 하나란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전에 없던 독특한 색이 나오거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색이라 고스란히 하수구로 흘려보내야 하거나

이 영화는 작년에 영어 제목을 <Laundry Warrior>에서 지금의 <Warrior's Way>로 변경했습니다. 정확한 이유야 저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제목을 바꾸면서도 '워리어'라는 단어를 버리지 못한 것은 <워리어스 웨이>가 작품 내외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이는 결국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우리나라 배우의 한계를 다시 한번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다들 아시파시피 이보다 앞서 개봉했던 <닌자 어쌔신, 지아이조>에 각각 출연했던 비와 이병헌이 그랬던 것처럼 장동건도 <워리어스 웨이>에서 무사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즉 '무사'는 <블러드>의 전지현을 포함해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인 배우의 전형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안타깝긴 하지만 현실을 감안하면 이것은, 영화배우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는 타 국가를 공략하는 모든 대상들이 짊어져야 할 필수불가결한 선택입니다. 노래로 치자면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부르거나 혹은 내수용과는 다른 스타일의 곡을 택하는 것, 음식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맛이 아닌 새로움을 가미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공히 현지인들의 취향에 맞추고자 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워리어스 웨이>가 취하고 있는 노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약자의 입장에서 인종에 따른 편견과 선입견의 틈새를 조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려 한다면, 그들이 갖고 있는 동양인의 전형을 공략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순수하게 우리의 언어와 배우 및 스탭으로 할리우드 시장을 점령한다면야 더 없이 좋겠지만, 냉정하게 말해 적어도 아직까지는 희망사항에 불과합니다. 만약 이것을 비판하고 싶어하시는 분들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명제 - "문화상품도 수출은 반드시 필요하다" 따위의 - 를 우선대상으로 삼는 것이 맞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세월이 한참 흘렀다고는 하나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을 타켓으로 할 때 유용한 도구로 쓰입니다. 상당부분이 왜곡된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동양의 문화를 경외시하는 면이 포함된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니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려고 자처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워리어스 웨이>에는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동양의 배우가 갖게 되는 운명과 함께 또 하나의 고민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주요 설정뿐만 아니라 단독 주연을 맡았다는 점에서 <워리어스 웨이>는 <닌자 어쌔신>과 비교할 수 있는데, 전자가 현지화를 위해 택한 바는 후자와 사뭇 다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닌자 어쌔신>은 그야말로 미국인이 가지고 있는 동양인에 대한 신비감 내지는 경외감, 혹은 나쁘게 말하면 무지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라이조가 '닌자'라는 것이나 영화 자체가 닌자를 앞세운 액션에 포커스를 맞췄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반면에 <워리어스 웨이>는 크게 차이가 없는 캐릭터를 등장시킴에도 상대적으로 액션의 비중을 축소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최고의 암살자로 등극하는 주인공을 담은 극의 오프닝에서 잘 보여집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압도적인 전투력을 선보이며 단숨에 상대방을 제압하는데, '단숨에'라는 표현에 걸맞게 그 과정의 묘사가 상당히 축약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관객의 요구와 다르게 액션씬이 화려할지언정 치열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동시에 러닝타임을 절약하려는 의도의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지만, 저는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닌자 어쌔신>과 <워리어스 웨이>가 동일한 소재로 가지게 되는 태생적인 공통점이자 한계는 이들이 노릴 수 있는 관객층의 폭이 협소하다는 것입니다. 보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동양의 무사, 그것도 칼부림을 하며 사지를 절단하는 액션에 열광하는 미국의 관객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다시 선택과 집중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어차피 한계가 극명한 만큼 기성 관객의 요구에 집중할 것이냐, 아니면 조금 더 욕심을 내어 보다 넓은 관객층을 형성하고 그들을 흡수하려는 선택을 할 것이냐. 아마 제작하는 입장에선 햄릿의 그것만큼이나 갈등을 하게 되는 문제일 겁니다.

전자에 부합하는 영화가 <닌자 어쌔신>이라면 후자는 <워리어스 웨이>입니다. <닌자 어쌔신>이 개봉했을 당시에 대다수의 평단과 관객이 보인 반응은 "볼거리는 많으나 그게 전부다"라는 것으로 종합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반면에 <워리어스 웨이>는 과감한 선택을 하여 액션을 상대적으로 줄이는 대신에 드라마를 가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남겨지는 문제는 과연 이러한 전략이 적중할 것이냐, 아니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켜서 폭이 넓지 않은 기성 관객으로부터마저 외면받게 되느냐 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선택 자체가 도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워리어스 웨이>의 주인공은 자신이 목표로 한 최고의 암살자가 되었으나 천진난만한 미소의 아기를 차마 죽이지 못해 도망자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그래서 옛 동료가 있는 이국으로 건너와 생김새도, 언어도 다른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전에 그가 보여줬던 면모를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새 삶을 살기로 택한 주인공은 그들과 어울리며 점차 냉혈한으로서의 자아에서 탈피합니다. 아울러 여자와 로맨스를 꽃피우기도 하지만, 이대로 끝이 날 리가 만무한 영화는 악당을 등장시키며 그가 조용히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사실 이 자체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자신을 동면에 이르게 하고 개과천선하려는 주인공을 어떤 식으로든 자극해 각성하게 만든다는 설정은 일련의 무협영화와 히어로 무비에 익히 등장했습니다. (권투영화인 <록키 5, 록키 발보아>마저 이러한 설정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하고 많은 직업 중에 굳이 세탁소를 운영하고 다소 비현실적으로 사막에 꽃을 심는다거나 아기를 돌보는 등의 행위가 내포한 의미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국인 감독이 이와 같은 새로운 시도를 접목했다는 것이 <워리어스 웨이>의 미국 내 흥행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당연히 이것만으로 흥행에서 이전보다 약진하리라는 장담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워리어스 웨이>가 돌파구라고 찾은 길이 비상구로 이어질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할지는 현재로서 미지수입니다. 또한 이건 이승무 감독님께서 제작발표회에서 말씀하셨던 것과 일맥상통하는데, 로케이션이 아닌 세트에서의 촬영이 주가 되면서 다분히 판타지적인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 것도 흥행의 추가 어디로 기울어질지 쉽사리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서 이상과 같은 이유로 <워리어스 웨이>의 흥행성과가 굉장히 궁금해졌습니다.

덧 1) 재미가 있냐, 없냐를 놓고 말해보라고 하시면, 앞서 말한 그대로 어떤 판단을 내리기 조금 애매합니다. <워리어스 웨이>는 퓨전이라는 측면에서 색다른 시도와 썩 나쁘지 않은 결과물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제 취향에 근거하여 주관적인 결정을 내려보자면... 별점을 보시면 됩니다. (참고로 별 세 개는 "볼만하다, 나쁘지 않다"입니다)

덧 2) 장동건의 연기는 솔직히 평범합니다. 캐릭터의 내면심리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다 풍부하게 표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 밖에 대니 휴스턴, 제프리 러쉬와 같은 연기파 배우가 등장하지만 케이트 보스워스의 연기야말로 <워리어스 웨이>에서 빛을 발합니다. 극에 감정선이 빈약하다는 것을 혼자 고군분투하며 메우고 있습니다.

덧 3) 연출도 나쁘진 않지만 그보다 촬영이 눈에 더 들어왔습니다. 컴퓨터의 힘을 빌린 시각효과 외에 카메라가 보여주는 다양한 앵글과 동선의 변화, 인물배치 등이 화려한 화면을 구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촬영감독이 누군가 찾아봤더니 한국인(김우형)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필모를 보니 제가 좋아하는 영화도 꽤 있는 베테랑이시네요.

덧 4) 예고편에서 가장 돋보였던 장면 - 어둠 속에서 칼을 휘두르는 - 에 꽹과리와 징을 사용한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기대 이상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더군요. 그래서 또 음악감독이 누군가 찾아봤더니... 이번엔 한국인이 아니네요 ㅎㅎㅎ 그럼에도 이토록 적절하게 우리의 전통악기를 가미했다는 것 역시 놀랍긴 마찬가지네요.

덧 5) 더 하고 싶은 말은 남았지만 이미 여러분에게는 충분히 길어진 글이 된 듯하여 이만 줄이겠습니다. ^^; 평소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제 지론이 "관객이 보지 않는다면 존재이유가 희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제 글도 많은 분들이 읽어주실수록 기쁩니다만... 그러자니 제 주관의 충실한 피력과 타인의 시선이 충돌한다는 문제가 생기는군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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