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 하면 투혼과 더불어 기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단 하나의 꿈을 향해 땀방울을 흘리며 마침내 꿈을 이뤄내는 그 과정 자체만으로도 드라마 같은 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작은 국토임에도 스포츠로 한국의 힘을 알리며 세계 Top10 수준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말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고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동계올림픽을 제외한 모든 각종 국제 대회를 유치한 것은 한국 스포츠의 힘을 세계에 과시하는 또 다른 요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시작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 1997년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1999년 강원 동계 아시안게임,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2002년 한일월드컵,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이어 2011년에는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이, 2014년에는 인천 아시안게임이 개최돼 그야말로 '그랜드슬램'과 다름없는 국제 대회 유치 경력을 자랑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그런 가운데 한국이 또 한번 월드컵을 2022년에 유치하려 하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도 앞두고 있어 과연 또 다른 국제 대회 유치 신화를 이룰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습니다.

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 아시안게임 등 메이저 국제 대회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그야말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대단한 유치 활동으로 이 모든 것을 개최한 전 세계에 얼마 안 되는 국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안 될 것만 같았던 상황에서 막판 반전으로 기어이 유치에 성공하면서 외형적으로는 한국의 힘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내형적으로도 한국 스포츠의 질적인 발전에 기여하는 이익을 얻었습니다.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당시 위원장과 박세직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이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나란히 서 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있었던 IOC 총회에서 있었던 1988년 올림픽 유치 전쟁은 그야말로 기적의 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짜릿한 대역전극을 일궈낸 한편의 드라마였습니다. 당시 10.26 사태로 촉발된 불안한 국내 정세와 개발도상국 올림픽 시기상조론 때문에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가 심했고, 유치위원회 역시 접수 마감 나흘 전에 신청서를 모두 작성해 제출했을 만큼 상당히 힘든 유치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전경련 회장이었던 정주영 당시 현대 회장이 유치위원장에 선임되면서 적극적이고 감성적인 유치 활동으로 서서히 표를 따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경쟁도시인 일본 나고야 측이 손목시계를 돌릴 때 정주영 회장이 꽃다발과 과일을 IOC 위원들에 돌려 감성을 자극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유치 활동 덕에 82명 IOC 위원 중에 26명만 한국을 찍을 것이라는 당초 비관적인 예상을 깨고 52-27 이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일본 나고야에 승리를 거두는 기적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서울올림픽 유치로 한국은 일본 도쿄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올림픽을 유치하게 됐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분야 등에서 상당한 변화를 가져다주며 한국 현대사에 남을 대(大)사건 중에 하나로 남게 됐습니다.

▲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확정지은 뒤 정몽준 FIFA 부회장과 나가누마 겐 당시 일본축구협회장이 FIFA컵을 동시에 들어보이고 있다.
이후 또 하나의 기적 같은 유치 전쟁을 이야기한다면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일본이 198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월드컵 유치 활동을 벌였던 가운데서 개최지 발표까지 2년밖에 남지 않은 1994년에야 본격적으로 유치 활동을 벌인 한국이 역전할 가능성은 없어보였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FIFA 부회장에 선임돼 집행위원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면서 상황은 급반전됐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유치 전쟁이 치러졌습니다. 신문, 방송에서는 1년 전부터 연일 월드컵유치에 대해 상당 시간, 분량을 할애하며 분위기를 띄웠고, 금방 일본과 대등한 수준으로 경쟁력을 갖췄습니다.

특히 당시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이 일본을 밀고 있던 가운데서도 교묘하게 반(反)아벨란제 전선을 만들면서 한국 쪽으로 포섭한 계획은 매우 신선하면서도 한국이 월드컵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결국 주도권이 한국 쪽으로 넘어오면서 일본을 밀던 아벨란제파, 지지층은 공동 개최 카드를 꺼내들었고, 집행위원 만장일치로 월드컵 공동 개최가 성사되면서 '사실상의 승리'로 월드컵 유치에 성공했습니다. 올림픽에 이은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년 8월에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 대회 유치도 이전 사례와 비슷한 면이 많았습니다. 사실 육상과 한국이 크게 매치되는 면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유치 가능성을 애초부터 낮게 본 사람들이 많았고, 이에 대한 내부적인 관심도 적었습니다. 그러나 유치위원회와 대구 시민들의 적극적인 유치 활동이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실사단에 깊은 감명을 주었고, 총 25표 가운데 17표 이상을 얻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기분 좋게 유치권을 따내고 내년 대회 개막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두 번에 걸친 평창 동계올림픽의 유치 실패는 아쉬움이 남는 도전이었습니다. 2003년 첫 도전 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라는 약점을 딛고 감성적인 유치 활동으로 1차 투표에서 최고 득표수를 받는 선전을 펼쳤지만 캐나다 밴쿠버에 아깝게 밀려 탈락했습니다. 그리고 2차 도전인 2007년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발표자로 나서는 등 전방위적인 유치 노력으로 역시 1차 투표 최고 득표를 기록했지만 물량 공세와 적극적인 로비로 막판 대반전을 이룬 러시아 소치에 밀려 또다시 쓴맛을 봤습니다. 그래도 중소 도시라는 약점을 딛고 평창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면서 최종 투표까지 상당한 선전을 펼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보는 시각이 많고, 이 때문에 세 번째 도전이 펼쳐질 내년 7월 IOC 총회에서는 유치에 성공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 박지성이 1일(한국시간) 스위스 취리히 FIFA 본부에서 열린 2022년 월드컵 유치 희망국 프레젠테이션에서 '열정의 유산'이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 FIFA 홈페이지 >>
연이은 국제 대회 유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유무형적으로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주고, 무엇보다 척박한 환경에서 뛰는 우리 운동선수들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이 더 트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어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는 점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지어진 경기장, 연습장들이 현재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는 점,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만든 체육관이 지금도 각 종목별 경기로 잘 활용되고 있는 점을 들면 어느 정도 수긍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 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을 모두 유치한 나라가 이탈리아, 일본, 독일, 스웨덴, 스페인, 프랑스 뿐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이만한 대회를 유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그만큼 국가 브랜드 이미지 향상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줬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22년 월드컵 유치는 물론 내부적으로 다소 논란이 있기는 해도 큰 틀에서 놓고 보면 또 한번 한국 축구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2022년 월드컵 유치 활동이 과연 어떤 결말을 맺으며 끝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었던 국제 대회 유치 도전사(史) 못지않은 또 하나의 드라마로 한국 스포츠에 새로운 희망으로 기억될 유치 전쟁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대학생 스포츠 블로거입니다. 블로그 http://blog.daum.net/hallo-jihan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고,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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