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입법부는 지난 1996년 전력 규제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시장의 우월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장밋빛 전망’을 제시했다. 첫째, 전력 가격이 떨어질 것이다. 실제로 캘리포니아 입법부는 평균 전력이 최소 20%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을 법률에 직접 명시했다. 둘째, 전력산업의 효율성도 더 높아질 것이다. 과거 규제 하에서보다 환경보호는 더 잘 되면서, 서비스는 좋아지고 비용은 감소할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그레그 팰러스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민주주의>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소개한다. “1999년 샌디에이고에 사시는 부모님이 전기요금청구서를 내게 보내주셨다. 규제 철폐가 이루어진 첫 해에 요금은 20%가 줄어들기는커녕 379% 상승하였다.”

▲ '민주주의와 규제' 책표지.
2년 뒤인 2001년 1월, 캘리포니아에서 대규모 정전사태가 일어났다.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새크라멘토와 같은 대도시는 물론 캘리포니아 주 전체가 암흑에 빠졌다. 공장이 멈춰서고, 은행영업이 정지됐다.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 사상 초유의 정전 사태로 캘리포니아가 입은 손실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분명한 것은 그 무렵 발전회사들이 발전시설을 인위적으로 폐쇄했다는 점이다. 정전사태가 일어날 당시 발전회사들은 캘리포니아 전체 발전용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발전시설 가동을 한꺼번에 중단시켰다. 전력 현물시장에서 전기 부족 사태가 벌어지도록 조작하면, 전기 요금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주지사는 마침내 실토하고 만다. “캘리포니아의 규제 폐지 계획은 거대하고 위험한 실패이다…… 그것은 치솟는 가격, 가격 횡포, 불안정한 전력 공급을 초래했다. 간단히 말해 ‘에너지 악몽(energy nightmare)’이었다.”

이것이 널리 알려진 ‘캘리포니아의 재앙’의 실체다. 전력과 같은 공익사업(public utility)의 규제를 폐지하거나 민영화하자는 움직임은 지난 1980년대에 영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유행처럼 확산됐다. 규제는 그만두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시장주의자들은 규제받지 않는 시장이 전력과 같은 공공서비스 요금을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적정한 수준에서 책정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레그 팰러스트를 비롯한 이 책의 저자들은 그것이 ‘값비싼 환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이 씌어지던 2003년 현재, 공익사업의 규제 철폐를 실험했던 미국의 25개 주 가운데 최소 3분의 1이 정책의 ‘치유’에 착수했고, 아직 시장 실험을 시작하지 않은 2분의 1은 그런 ‘실패의 경험’을 통해 공익사업 규제를 과거처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고 저자들은 이야기한다.

▲ 스티글리츠.
비단 미국의 사례 뿐만은 아니다. 각국의 외환위기가 이런 ‘글로벌 스탠더드’의 수용을 외부적으로 강제하는 계기였다면, 자유무역협정 시대의 규제 철폐와 민영화는 그런 시대적 흐름을 보다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세계은행의 수석경제학자였던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주도하는 ‘경제적 지옥으로 향하는 IMF의 4가지 단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영화 → 자본시장 자유화 → 공익사업 규제 철폐와 가격인상 → 자유무역. 세계무역기구(WTO)와 세계은행(IBRD), 국제통화기금(IMF)이 설정해놓은 이 규율에서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경제적 지옥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 섬뜩하군.)

<민주주의와 규제>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이 보여주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경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저자들은 “우리는 미국의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규제의 ‘규칙’이 아니라 규칙이 만들어지는 ‘방식(method)’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력, 전화, 가스, 상수도 등 공공서비스에서 저비용, 고품질을 이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저자들이 제시하는 것은 바로 ‘민주적 규제(democratic regulation)’다. 민주적 규제의 공식은 간단하다. 첫째, 정보에 대한 국민들의 완전하고 공개적인 접근. 둘째, 서비스 기준과 가격 결정에 있어서 국민들의 완전한 참여.

▲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민영화. 규제 완화. 요즘 참 많이 듣는 얘기다. 이명박 당선자가 꾸릴 새 정부의 의지는 단호한 것 같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인수위의 ‘장밋빛 정책’들이 이것저것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현 정부의 실정(?)에 진저리가 난 국민들의 기대감도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대로라면 움츠렸던 경제가 다시 살아나고, 서민들 역시 잃었던 활기를 금방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동안 국민들이 받은 스트레스를 감안하면, 새 정부가 국민들에게 이런 새로운 희망을 던져주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새 정부의 갖가지 청사진을 접할 때마다 자꾸만 ‘포퓰리즘’을 연상하게 되는 건 왜일까? 시장과 기업에 더 많은 자유를 주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서민들의 주름살이 펴질 수 있을까? ‘국민적 합의’와 관련해서는 이미 우려했던 상황이 조금씩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실제로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는 권리와 대비하여 볼 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리는 독재적으로 내려진 결정에 정통성을 주는 데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 것도 안 할 때보다 더 나쁠 때도 많다.” 얼마 전 대운하와 관련해 1년으로 시한을 못 박아 놓고 추진한다는 인수위의 입장에 대해 한 시민단체 간부가 방송 인터뷰에서 한 말과 똑같다.

저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정보에 대해 국민들이 완전하고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서비스 기준과 가격 결정 과정에 완전하게 참여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는 자명하다. 물론 저자들이 말하는 미국의 모범적인 ‘민주적 규제’의 사례를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대입시키는 데는 상당한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옮긴이가 말한 것처럼, 시장의 대세를 좇아 민영화론과 규제 철폐를 찬성하는 이들에게도 이 책은 그 도저한 설득력으로 인해 ‘놀라움’을 준다.

2001년 KBS에 기자로 입사했다. 2004년 8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KBS 매체비평 프로그램 <미디어포커스>를 제작 담당하면서 언론에 관심 갖게 되고, 2006년 11월부터 1년 동안 50회에 걸쳐 미디어오늘에 <김석의 영화읽기>를 연재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보도한 탐사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의 저서 <밀라이 학살과 후유증에 관한 보고>를 번역 출간 준비 중이고, 현재 KBS 사회팀 기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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