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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공포영화 ‘어스’, 완벽 스릴러 경유하여 이른 ‘여기의 우리’란 서늘한 인식[미디어비평] 톺아보기
meditator | 승인 2019.04.02 10:56

2003년 개봉된 영화 <언더월드>는 지상세계를 차지한 뱀파이어와, 그들에 의해 지하세계로 밀려난 늑대인간의 끝나지 않는 전쟁을 그리고 있다. 같은 선조 코르니누스로부터 시작된 후손들. 하지만 박쥐와 늑대를 통한 유전학적 변이로 인해 그들은 서로 달라졌고, 그 다름은 곧 '전쟁'의 이유가 되었다. 이렇게 고전적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라는 설화적 콘텐츠를 통해 지상과 지하로 이분화된 세계를 상징했던 <언더월드>의 2019년 판은 설화에서 '과학'으로 그 수단이 변경된다. 

<어스>는 자막에서 시작된다. 미국 대륙 아래 수많은 땅굴들이 파헤쳐져 있는데 그중에는 용도가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 있다고. 땅굴? 하는 의문도 잠시, 관객은 영화 시작과 함께 시끌벅적한 놀이공원을 지나 유령의 집에서 벌어지는 은밀하고도 숨 막히는 서스펜스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공포영화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 <어스> 스틸 이미지

<어스>를 보고 나오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영화에서 풍성하게 제시되는 갖가지 상징체계들,  조던 필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를 독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어스>가 영리한 영화인 것은 그저 공포영화로서의 '스릴과 서스펜스', 그 자체를 만끽할 수 있도록 영화가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스릴과 서스펜스의 출발점은 무엇일까? 개체로서의 나, 그리고 나아가 집단으로서 나에 대한 위기와 전복의 불편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삶 자체가 유동적임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뿌리내리고 싶어 하는 지속적인 갈망 위에서 '정착'을 지향한다. 그 정착의 갈망에 대해 '이반'의 삽질이 시작되는 지점에 바로 스릴과 서스펜스가 작동한다. 

나와 내 가족에 대한 공격, 그리고 내가 깃든 공간, 즉 집에 대한 공격은 곧 삶에 대한 위기로 이어진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렵게 내가 일군 것들에 대한 공격은 그 어떤 공포보다 크게 다가온다. 최근 공포영화에서 '집'이란 공간이 배경으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관객들이 보기엔 어리석을 정도로 그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집착’으로 공포를 추동해 나가고, 그런 집착의 지점에 대한 영리한 공격에서 바로 '공포'는 극대화되어간다. 

<어스> 역시 바로 그 지점에서 공포가 시작된다. 어린 시절 공포의 집에서 어떤 일로 인해 실어증을 겪었던 애들레이드(루피타 뇽 분). 하지만 이제 사춘기의 딸과 장난꾸러기 아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여름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는 어엿한 주부가 되었다. 남편이 산 낡은 보트, 딸이 포기한 육상, 아들의 어이없는 장난 등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중산층 가정의 여유로운 소음과도 같다. 어릴 적 '사건'이 났던 산타크루즈 해변에 대한 찜찜함을 지울 수 없지만 가족이 좋다면야 엄마는 자신의 불편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영화 <어스> 스틸 이미지

하지만 이런 일상의 잡음, 소음들은 그날 밤 이 가족을 찾아온 의문의 일가족 앞에는 그야말로 새 발의 피 수준이다. 저마다 가위를 들고 다짜고짜 애들레이드 가족의 별장에 쳐들어온 가족. 놀랍게도 그들은 스스로 주장하는 바 애들레이드 가족의 그림자, 도플갱어들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화는 애들레이드 가족으로 말미암아(?) '지하생활'을 했다는 그림자 애들레이드 가족의 복수극, 탈환극에 대항한 애들레이드 가족의 처절한 ‘생환기’로 이어진다. 

일방적인 공격에서, 적들의 빈틈을 노린 기지로 회생하는 가족들. 자신들을 공격했기에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처절한 보복.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번 위기를 겪으며 끝내 완벽하게 생환한 가족. 하지만 과연 '우리' 가족은 여행을 떠나던 ‘그 가족’이 맞을까라는 의혹의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엔딩까지, <어스>는 잘 짜여진 가족 스릴러의 성공적인 전형을 따라간다. 

즉 영화가 풍성하게 담고 있는 갖가지 상징적 기호들을 굳이 독해하지 않더라도, 스릴러 영화로서의 재미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어스>는 조던 필 감독의 전작 <겟 아웃>의 흥미롭고 신선한 구성의 계보를 따른다. <겟 아웃>이 순진한 흑인 청년에게 닥친 뜻밖의 위기라는 모티브를 충실하게 풀어내며 새로운 공포영화로서 관객들에게 '호평'의 불을 지펴갔듯이, <어스> 역시 평화로운 휴가 길에 나선 한 가족에게 들이닥친 '도플갱어'들의 공격이라는 흥미로운 요소만으로도 충분히 볼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어스, 그 풍부한 상징

하지만 이미 <겟 아웃>을 통해 미국 내 흑백갈등을 절묘한 상징을 통해 풀어낸 조던 필 감독에게 열광한 바 있었던 관객들은 애들레이드 가족을 찾아온 지하세계 그림자 가족들에 대해 해석을 더한다. 

영화 <어스> 스틸 이미지

'we are the world', 'America is beautiful'이란 슬로건 아래, 굶주린 이들을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해 산타모니카 해변을 비롯한 미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인간 사슬 만들기. 하지만 <어스>는 그 '우리'라는, 아름답다는 아메리카가 사실은 차별적 구조로 이루어진 사회임을 드러낸다. 휴일 사람들이 놀이공원에서 여유를 즐길 때, 그와 똑같은 모양을 한 지하의 사람들은 같은 모습, 다른 행태의 서글픈 삶을 보여준다. 그저 그들이 '복제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영화는 그 복제인간의 구분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주인공에게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과거의 진실을 통해 고발한다. 마치 <겟 아웃> 속 늙은 백인들이 탐한 건강한 흑인들의 육체처럼 구획과 구분, 차별의 무의미함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여기서 조던 필 감독은 인간과 복제인간이라는 차등적 구도를 낳은 이유로 '무차별적인 과학실험'을 든다. 복제인간이 뛰쳐나간 지하공간에서 철장을 벗어나 산발적으로 널려진 토끼들.  그들이 복제실험의 희생양이듯, 토끼로부터 시작된 인간들의 무차별적 실험은 결국 같은 인간으로 귀결되었다는 '묵시록'적 세계를 감독은 펼쳐 보인다. 

이는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을 초래한 원인이 '과학기술의 발달'에 있음에 대한 예리한 인식에서 기인한다. 1차 산업혁명, 2차 산업혁명, 그리고 3차 나아가 4차까지 인간 사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과학의 발달을 추동하고, 그에 기반하여 자신의 문명들을 업그레이드 해왔다. 하지만 그런 문명이 안타깝게도 '인간 사회의 수평적 구조'에 이바지하는 대신, 수직적 위계 구조의 재생산으로 귀결되어 왔다는 감독의 인식이 영화 속 복제인간과 인간의 차별적 구조로 나타난다. 

영화 <어스> 스틸 이미지

영화 속 복제실험의 결과물로 등장한, 도플갱어들이 꾸린 장대한 해방의 대열은 <겟 아웃>의 흑백차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혹은 토착민과 외래인, 그리고 사회 내의 갖가지 차별구조 속 인간들의 상징으로 풍성하게 읽어 낼 수 있다. 그러기에 <어스>는 우리 가족의 그 US부터 미국을 상징하는 United States를 넘어 우리가 사는 세계에까지 이르른다. 

<겟 아웃>은 우리가 보기엔 상대적으로 편했다. 왜냐하면 바다 건너 아메리카가 품은 역사적 차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어스>는 과학기술 문명에 기댄 인간 사회가 치달아낸 결과물로서 차별적 구조에 대한 묵시록적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여기의 우리 역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겟 아웃>이 저들의 이야기였다면, <어스>의 그 우리는 ‘여기의 우리’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어스>가 주는 본질적 공포는 바로 그 묵시록적 세계의 일부분에서 내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편한 인식에 도달한다. 나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피치 못해서’를 넘어 거침없이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는 영화 속 애들레이드 가족. 그 가족에 동일시했던 시선이 나도 그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향할 때, 어쩌면 나 역시도 나와 내 것에 도전하는 그 누군가를 향해서는 적개심보다 더한 것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서늘한 상상이야말로 <어스>가 주는 가장 큰 공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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