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번 아시안게임 마라톤 우승자가 한국에서 나올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워낙 침체기에 빠졌던 마라톤이었고, 이봉주 이후 뚜렷하게 간판 마라토너가 나오지 않아 부진이 오래 갈 것이라는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민족의 한을 풀어내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고, 1947년 서윤복 선수가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한국 육상의 자존심과 같았던 마라톤의 부진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뚜렷한 대안이나 대책도 없었고, 이번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현주소'만 확인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보기 좋게 깬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지영준(코오롱)이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그저 '기대주'에만 머물러있었을 뿐 국내에서는 잘 하고도 해외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해 뭔가 아쉬움이 많았던 지영준이 마침내 고대하던 원정 국제 대회 마라톤 금메달을 따내면서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함께 달리던 선수의 신경전 속에서도 지영준은 이를 악물고 달렸고 꾸준한 레이스 운영 능력과 빼어난 작전 구사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일궈내며 개인적인 쾌거는 물론 한국 마라톤에 새로운 희망을 안겼습니다.

▲ 지영준이 아시안게임 남자 마라톤에서 2시간11분11초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27일 오후, 중국 광저우 대학성 철인 3종 경기장 주변에서 열린 42.195km 마라톤 풀코스에서 지영준은 2시간 11분 10초의 기록으로 골인해 8년 만에 한국 마라톤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안겼습니다. 초반부터 선두권을 유지하며 쾌조의 컨디션을 보여준 지영준은 25-30km 지점부터 앞으로 차고 나가기 시작해 35km 지점부터는 경쟁 선수들과 차이를 1분 이상으로 벌려 놓으며 사실상 승부를 갈랐고 이를 꾸준하게 유지해 결승선으로 들어오며 그토록 바랐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다소 저조한 기록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악전고투 속에서 거둔 값진 우승이어서 그 의미는 남달랐습니다.

사실 지영준에게는 몇 차례 위기가 있었습니다. TV로 경기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선두권에서 줄곧 경쟁을 펼쳤던 2006년 도하 대회 우승자 무바라크 하산 샤미(카타르)와 경기 도중 몇 차례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급수대에서 물을 집으려 하는데 지영준이 자신의 물을 가로챘다면서 '과잉 액션'을 취했던 샤미는 이후에도 계속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지영준을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지영준은 여기에 전혀 휘말리지 않았고 자신만의 레이스를 펼치면서 역주를 거듭하며 마침내 35km 지점을 넘어서면서부터 샤미를 완전히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타이밍을 놓치고, 기분이 잔뜩 상해 있던 샤미는 지영준의 갑작스런 스퍼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쭉쭉 앞으로 뻗어 나간 지영준은 그 페이스 그대로 결승선을 향해 질주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결승선을 힘차게 통과했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며 해설을 하고 있던 이봉주조차도 지영준의 레이스에 크게 기뻐하고 흐뭇해했을 정도였습니다.

이 모습을 돌이켜보면 참 간만에 마라톤에서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시나리오대로 나왔다 하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그동안 케냐,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선수들의 엄청난 성장과 그에 따른 레이스 운영 변화로 이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전혀 힘도 쓰지 못했던 경우가 계속 있어왔습니다만 적어도 이번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만큼은 한국식의 막판 스퍼트, 레이스 운영이 어느 정도 적중하면서 고대하던 금메달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고 봅니다. 이런 경기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지영준 본인의 엄청난 노력, 그리고 정만화 감독의 헌신적인 지도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고, 그동안 해왔던 상당한 훈련량이 결국 오늘날의 지영준을 거듭나게 한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 금메달을 따낸 뒤 태극기를 들고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초만 해도 지영준은 개인적인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소속팀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아 심지어 은퇴도 불사할 생각을 가졌던 걸로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고비를 넘기고 운동에만 전념하며 마음을 다 잡은 지영준은 올해 엄청난 기록 향상을 내면서 이봉주 이후 공석이나 다름없는 한국 마라톤 간판 유력 후보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정상 자리에 오르며 크게 주목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내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에서 더 큰 꿈을 갖고 더 이를 악물고 달릴 지도 모릅니다. 훈련에서 2시간 6-7분대를 찍을 만큼 몸상태가 최고조에 달해 있어 겨울, 내년 봄을 잘 이겨내면 한국신기록 뿐 아니라 황영조, 이봉주도 못했던 세계선수권 메달권 진입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아직 케냐, 에티오피아 선수와 비교했을 때 다소 갈 길은 멀다 하더라도 '한 아들의 아빠'로서 마음을 다 잡고 다시 출발하며 아시아 정상까지 밟은 지영준의 행보를 보면 내년 세계선수권 전망이 어느 정도 밝은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쾌거를 넘어 한국 마라톤의 새로운 희망의 불빛을 밝힌 지영준의 역주를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또 기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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