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전혀 기대하지 않고 관람한 영화가 의외로 뒤통수를 엄습하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본 <달콤, 살벌한 연인>이 그랬었죠.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최강희나 박용우에 대해 그닥 배우로서의 호감을 가진 입장이 아니라 그저 그런 로맨틱 코미디겠거니 하고 봤는데, 이게 웬걸요!? 멜로에 코미디 그리고 스릴러까지 아주 복합적인 장르로 버무린 솜씨를 보니 이거 웬만한 할리우드의 수작 코미디 영화 못지않았습니다. 일찍이 <시리얼 맘>이란 영화에서도 이와 같은 야릇한 장르의 혼합 및 변용을 보았고, 이후 <베리 배드 씽>이나 프랑스 영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도 있었지만 <달콤, 살벌한 연인>은 복합장르라는 면에서 이들보다 좀 더 나아간 작품이었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시리얼 맘>의 존 워터스가 초기에 만든 <핑크 플라밍고>는 지금 생각해도 크나큰 충격이 몰려오는군요. -_-;)

<이층의 악당>을 보러 가면서 기대한 것은 역시 <달콤, 살벌한 연인>과 같은 기상천외한 웃음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끔찍한데 배꼽을 잡으며 웃고 싶게 만들고, 포복절도하는 와중에도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모순 같은 거랄까요? 그러한 기대치에 비하면 <이층의 악당>이 선사하는 웃음은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작이 워낙 강렬해서인지 이번 영화는 그리 세게 나가는 장면도 없어 꽤 건전한(?) 축에 속합니다. 이건 관객에 따라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보자면 <달콤, 살벌한 연인>과는 달리 영화의 개성이 딱히 도드라지지 못하는 단점을 동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관객들을 웃게 만드는 방식은 전작과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캐릭터의 엉뚱함이라든가 예상치 못한 전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약간의 가학적인 면이 그렇습니다.

전반적으로 <이층의 악당>은 선이 굵은 영화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딱 한번 미친 듯이 웃게 만드는 장면이 있긴 했지만 마무리가 흐지부지해지면서 비중이 희석되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엄마와 우울증을 견디다 못해 자살까지 하려는 딸을 배치하면서 무언가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으나, 그것도 코믹한 요소에 가려져 제대로 빛을 발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시종일관 자잘한 웃음을 촘촘하게 배치한 덕분에 실망적인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과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잔재미에 충실한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도 모처럼이었어요. 아울러 한국 코미디 영화의 고질적인 병폐에서 꽤 능숙하게 비켜가는 것도 이 영화에서 맘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한석규의 코미디 영화니 배우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겠죠? 예전에 비하면서 명성이 많이 퇴색하여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던 참인데, 솔직히 <이층의 악당>에서도 빼어난 연기를 보여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졸연은 아니지만 한석규에게 바라는 기대치에 비하면 평균점 이상은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김혜수의 연기는 탁월합니다. 예전에 <좋지 아니한가>를 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혜수의 연기가를 맘에 들었었는데, 이번에도 그 못지않은 연기력을 보여주면서 빛을 발합니다. 평소에 워낙 이미지가 강렬한 배우라 그런 걸까요? 재차 보더라도 김혜수는 이렇게 약간 푼수끼 넘치는 캐릭터가 딱인 것 같아요. 제게는 꽤 비호감에 속하는 배우인데도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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