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개혁 과제 중 정치제도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선거제도 개혁일 것이다. 선거법 개정이 끝내 될까?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당들이 뭔가 합의를 만들어 가는 것 같지만 여의도 주변의 공기는 긴가민가이다. 과연 패스트(fast)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조차 의문이지만 어찌됐건 패스트트랙의 330일이 지나고 진실의 순간이 오면 각 당 소속 의원들의 이해득실이 수면 위에서 논의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심상정 의원의 실언(?)이 뜨거운 감자가 돼버린 건 이 때문이다. 기자가 ‘산식’을 물은 이유는 이른바 ‘시뮬레이션’을 돌려 합의안이 어느 당에 유리한지를 따져 보려는 것이다. 심상정 의원 입장에선 ‘누구에게 유리한 안’이란 평가가 공식화되는 것 자체가 이후 합의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이 산식을 꼭 알아야 하느냐”는 말은 이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치 9단이라는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도 자기 머리로는 합의안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는데, 사실 안 자체가 그렇게까지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지역구 의석을 일부 줄이고 대신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작동 가능하도록 하되 의원 정수는 300인으로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이른바 ‘준연동형’이란 형태로 50%만 혼합형 비례대표제를 적용하기로 했고 남은 비례대표 의석 수는 기존의 병립식에서 계산하던 그대로 나누며 석패율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박지원 의원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이런 제도의 얼개가 아니라 실제로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며 그 결과는 누구에게 유리한 것인지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선거법이 이런 형태로 개정되면 정의당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되리라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바른미래당 내의 바른정당 출신 의원들은 이 사실에 더해 패스트트랙에 공수처 설치와 검경수사권조정 등의 안까지 추가돼있다는 이유로 “여당 좋은 일만 해주는 합의”라는 평가를 내놓고 반발하고 있다.

바른정당 출신 의원들의 반발은 물론 지지 기반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각개격파’에 나선 자유한국당의 설득이 먹힌 측면도 있을 것이다. 만일 선거법 개정이 끝내 실패로 돌아가면 그때가서 누구에게 손을 벌리겠는가? 이렇게 바른미래당 내의 바른정당 의원들이 알아서 싸워주니 민주평화당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분위기다. 지역구 의석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반발이 있고 비례대표 의석 배분 최소 기준인 3% 이상 득표 역시 지금으로선 기대하기 어려운데, 그렇다고 지금대로 해서 총선 전망이 좋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법 개정에 대한 합의는 기적처럼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지만 정치권의 고민이 이런 수준에 머무른다면 끝내 실패를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조건을 뒤집고 선거법 개정의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의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국민이 선거제도 개혁을 너무나 절실히 원해 이를 부정하는 정치세력은 살아남기 힘든 여건이 조성되는 것이다. 둘째는 선거제도 개혁의 수혜자인 소수정당들이 대안적 정치의 가능성을 국민 앞에 분명한 형태로 내놓는 것이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는 둘 다 기대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어찌됐든 이런 해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해득실이 아닌 대의의 정치가 필요하다. 물론 정치는 근본적으로 한정적인 자원을 배분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양보를 강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총칼을 동원할 것이 아니라면 결국 대의를 호소하며 설득을 하는 수밖엔 없다. 자유한국당은 이 점을 알기 때문에 선거법 개정을 좌파독재라느니 하며 이해득실이 전부인 문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운데)가 17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선거법·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법 날치기 저지 긴급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해득실의 계산기 앞에서 대의가 실종되는 현상은 검경수사권 조정 문제에 있어서도 나타나고 있다. 몇 차례 지적했듯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버닝썬 사건, 김학의 성접대 의혹, 장자연 리스트 사건 등은 남성 집단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걸 가능케 하는 구조를 깨자는 대의로 이 사건들을 다루는 것이 좋겠지만 기성정치의 시선은 각자의 유불리를 따지는 것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버닝썬 사건은 검찰에게 유리하고 김학의 문제나 장자연 사건은 경찰에 유리한 문제라는 것이다.

최근 검찰과 경찰에 대한 논의는 모두 이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학의 성접대 의혹과 장자연 리스트 사건에 대한 대검 진상조사단의 조사 기간 연장이 결정되자 보수세력이 들고 나온 것은 김기현 전 울산시장 측근비리가 무혐의 처리 됐다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이 상황을 선거기간 동안 벌어진 경찰 과잉 충성의 결과로 규정하고 있다. 즉, 검찰의 ‘적폐청산’ 수사에도 불구 검경수사권 조정 논의를 제 궤도에 올린 이 정부는 결국 경찰과 한 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은 보수세력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결국 애초의 여성이 성적으로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현실에 대한 논의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런 구도에 기반한 인식은 보수세력의 지지자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과 반대편에 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이 정권의 관계자 및 지지자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또 하나의 최근 사례가 더불어민주당의 외신 기자 비난 사건이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외신을 인용하며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란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했는데, 더불어민주당이 논평에서 해당 표현이 담긴 기사를 작성한 기자 실명을 거론하며 “검은 머리 외신 기자” 운운 한 것이다.

이 문제는 층위를 둘로 나눠서 접근해야 한다. 첫 번째로 아시안아메리칸 기자협회 서울지부가 밝힌 것과 같이 ‘외신 기자’가 ‘검은 머리’인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런데도 집권 여당이 “검은 머리 외신 기자”라는 표현을 쓴 것은 화제의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결국 ‘저쪽 편’이란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의 두 번째 차원은 정치권과 언론이 서로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자가발전’하는 현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있다. 국내 보수언론이 자기들 구미에 맞는 뭔가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보수야당은 이를 인용하며 같은 주장을 재생산하며, 이를 다시 보수언론이 기사화 해 이슈를 눈덩이 굴리듯 키워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번 일을 이런 사례와 같은 관점으로 접근했다면 언론과 정치의 윤리에 대한 좋은 논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렇게 되진 않았다.

이렇게 각자의 유불리를 따지는 일만이 유일하게 가치를 갖는다는 식의 풍토 속에서 대안적 정치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꿈꾸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즉, 정치가 앞서의 사례들에서와 같은 태도로만 일관하는 것은 개혁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개혁을 거부하는 세력 때문에 개혁은 끝내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실패는 최소한 이전보다는 ‘더 나은 실패’여야 하고, “그것은 더 나은 실패였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피플파워’를 자처하는 정권이 좀 더 깊이 고민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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