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아시안게임 등 종합 국제 대회에서 태권도는 양궁, 유도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효자 종목으로 불려왔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은 우리나라가 태권도 발상 국가이고, 그만큼 다른 나라보다 월등한 기술, 실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해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국은 대부분 국제 대회에서 잇달아 좋은 성적을 유지해왔고 문대성, 김제경, 이선희, 임수정 등이 새로운 스타로 배출되면서 자존심을 꾸준하게 지켜와 국제 대회에서 '당연히 우승, 무조건 금메달'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태권도는 분명히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만큼 '평소보다 부진한' 성적으로 대회를 마쳐야 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한국은 자존심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이성혜, 허준녕, 이대훈, 노은실이 금메달을 따내며 금4, 은4, 동2개로 종합 성적에서는 중국, 이란을 제치고 가장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그러나 남녀로 나뉘어 살펴보면 사정은 달랐습니다. 남자(금2, 은3)는 3개 금메달을 따낸 이란에 뒤졌고, 여자(금2, 은1, 동2)는 무려 4개 금메달을 따낸 중국에 져서 처음으로 1위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다른 종목에 비춰볼 때 금메달 4개가 잘 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지난 도하 대회 때 9개를 따냈고, 이번 대회 목표가 8개 금메달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분명히 평소보다 많이 부진했던 것은 맞습니다.

▲ 아시안게임 태권도 남자 54Kg 급 결승전에서 한국의 김성호가 태국 추차왈 카우라오르에게 공격을 허용하고 있다. 결과는 패 ⓒ연합뉴스
일각에서는 워낙 금메달을 무조건 따내야 한다는 인식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새로 도입된 전자 호구 제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서 부진했다고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전자 호구 제도는 이번 대회 최대 화두로 떠오르며 향후 세계 태권도 판도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확인시키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이 전자 호구에 단 두 달밖에 적응하지 못해 대회 내내 고생을 했고, 결국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기력을 보여 아쉬움을 남기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그동안 너무 종주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것, 다시 말해 알게 모르게 자만심이 강했기 때문에 부진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자 호구가 변수가 될 것을 뻔히 알고 있었음에도 경기만 잘 하면 된다는 인식으로 금메달 목표를 8개나 뒀던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갑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제도 변경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기량, 기술 면에서는 충분히 한국 선수들이 월등한 만큼 잘 해낼 것이라는 안이한 인식이 결국 아시안게임 부진으로 이어졌다는 얘깁니다.

이번 대회에 한국은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제 경기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이 나섰습니다. 중국, 이란, 대만 등 경쟁국 선수들 가운데서 의외로 세계선수권, 아시아선수권 우승자들이 많이 배출됐던 가운데 한국은 대표 선발전을 통해 신진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세대교체를 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경기력을 갖고 있다 해도 경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외적인 요소에서 선수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중요한 순간에 점수를 내준 사례들을 잇달아 만들어내며 무릎을 꿇은 선수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반면 경쟁국들은 달랐습니다. 이번 대회를 보면 역시 경쟁국들 사이에 한국인 지도자들이 많이 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이 지도자들의 지도 아래 체계적으로 기술을 습득하고, 바뀐 룰에 잘 적응하면서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하다보니 결국 메달들을 대거 획득하는데 성공해냈습니다.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한국 선수들을 잇달아 제압했고, 안면 공격 등 기습적인 점수 획득으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던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몇 년 전부터 한국 태권도를 위협한 이란, 중국은 이번 대회에서 각 성별 경쟁에서 한국을 이기면서 한국의 위협적인 경쟁국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습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씁쓸한 결과기는 하지만 경쟁국들의 거센 도전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좀 더 탄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되새긴 셈이 됐습니다.

아직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지 10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경쟁국들의 성장이 빠르게 이어지면서 '평준화'가 이뤄진 것은 어떻게 보면 장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으로 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1964년 일본 도쿄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유도에서 한국이 꾸준하게 전력 상승을 해서 일본을 몇 차례 따돌리고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것을 보면 태권도에서도 이 같은 현상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경쟁국들의 실력 향상에도 아무런 발전 대책 없이 종주국의 자존심만 고집하다가는 정말 큰 코를 다칠 수 있습니다. 물론 매 국제 대회마다 뛰어난 지도자들과 선수들의 노력으로 오랫동안 최고를 달린 태권도였지만 이번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좀 더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존심을 고집하고 그저 세계 최강에만 안주하기보다는 더 화끈하고 창의적인 기술 발전 등을 통해 태권도가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하는 '진정한 종주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한국 태권도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번 부진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종주국 자존심을 버리면 한국 태권도는 더 높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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