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민주연구원장으로 정치권 복귀를 결정한 모양이다. 언론 보도를 보니 총선에 아예 직접 출마할 수 있다는 얘기도 있고 임종석 전 비서실장과의 파워게임(?)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는 것 같다. 지금 시점에서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아닐 것 같고 이런 보도 뒤에서 오갈 ‘암수(暗數)’를 짐작해 볼 따름이다.

하여간 여의도 정치의 계산기가 아닌 다른 방향에서 앞으로를 전망해 볼 필요가 있다. 양정철 씨의 등장이 갖고 올 정치 지형의 변화는 어떤 것일까? 언론은 양정철 전 비서관의 민주연구원장 기용이 총선 전략을 좌우할 하나의 수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의 과정을 되짚어 봤을 때 ‘양정철’과 ‘선거’란 단어의 조합이 더 개혁적이고 더 진보적인 정치 노선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떤 공학의 시선으로 보면 선거의 승패는 중도층 지지를 획득하는 것에서 판가름 난다. 개혁을 내걸고 집권한 정권의 중간에 치러지는 선거에서는 이 필요성이 더 커진다. 보수정부에서의 정권심판론은 대개 윤리적 문제와 같은 가치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이슈를 중심으로 형성될 가능성이 크지만 민주정부에선 경제적 성과가 주요하게 다뤄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정부 같은 경우 경제 분야에서 큰 논란이 없었다면 적폐청산 등 개혁 기조를 계속해서 밀고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소득주도성장을 둘러싼 이념적 논란이 지나치게 커졌고 고용지표의 악화와 부동산 가격 급등 등의 사건을 겪은 상태라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상태이다. 따라서 정책적 중도화를 통해 보수적 유권자들의 여론을 진정시키고 정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시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선거에 능한 양정철 전 비서관이 집권 여당의 총선 전략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면 바로 이 점에 주목할 것이라는 게 정치권과 언론의 평가인 것 같다.

물론 양정철 전 비서관이 아니더라도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주요 인사들은 벌써 이런 판단을 내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지난 8일 문재인 대통령이 단행한 개각 명단을 보면 그렇다. 이 명단에서 그나마 ‘개혁적’이라고 평가할 만한 사람은 통일연구원장을 맡고 있는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자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나머지 화제가 되고 있는 정치인 출신 장관 후보자 2인은 그 자체만 놓고 봐서는 인사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박영선 의원의 경우 경제 이슈를 나름대로 성실히 챙겨오기는 했지만 딱히 어떤 방향이 있다고 평가할 만큼의 일관성을 보여줬다고 보긴 어렵다.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인 진영 의원은 국회 행안위에서 활동했다는 이력 외의 어떤 소신을 갖고 있는지 알려진 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장관 후보자 지명은 업무 연관성 보다는 정치적 효과를 기준으로 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정치적 효과란 물론 박영선 의원의 서울시장 출마 전망 등과 맞물려 있는 것도 있지만 결국 중도층 공략이라는 큰 그림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박영선 의원은 이른바 당내 비주류로 분류되고 특히 진영 의원의 경우는 이전 정권에서도 장관을 맡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기용은 현 정권이 약속한 개혁적 정책을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면서까지 고집하기 보다는 비판을 잘 새겨 듣고 정국을 안정화 시키겠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연합뉴스)

11일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 나서는 날인데 여기서도 이런 기조가 확인될 것 같다. 연설의 주요 주제는 노동시장, 산업정책, 양극화, 사회적 타협 등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언론은 노동유연성 제고와 사회적 안전망 강화가 핵심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노동유연성과 사회안전망 강화를 교환하는 것은 굳이 도식화 하자면 사회적 합의의 최종단계로 볼 수 있다. 이를 이루는 것은 사회적 합의 구조가 실효적으로 제도화 돼있고 노동계와 재계가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실제적 수단을 갖고 있으며 이 틀 안에서의 합의는 나름의 강제성을 갖는 것이 전제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합의는 힘이 있는 쪽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힘이 없는 쪽에 강제하는 틀로 밖에는 기능할 수 없게 된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사회적 합의 구조를 제대로 논할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회적 합의의 주요 내용을 결정할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대통령 자문기구 수준의 권한만을 보장받고 있고 이 내에서 실효적인 논의 또한 진행되지 않고 있다. 또 재계가 다양한 이익집단 등 자기 의사를 정권의 핵심에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을 상당히 갖추고 있는 것에 비해 노동계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10%에 걸치는 수준의 교섭력만을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 산별교섭 법제화 등의 제도적 보장 논의도 별로 진전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유연성 제고와 사회 안전망 강화를 말하는 것은 그저 노동유연성 제고를 받아들이란 말과 다를 게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간 정부 여당은 노동계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사실상 거부해왔다.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해 인상 효과를 낮췄고 올해는 아예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을 통해 현행의 최저임금위원회 체계를 사실상 무력화 시킬 예정이다. 경사노위 산하 노동시간제도개선위는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 확대를 결정해 미조직 노동자들을 주52시간 근무 밖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떠맡았다. 이에 반발해 청년 여성 비정규직 등 취약 계층 대표 위원들이 경사노위 본위원회 참여를 거부하자 이제는 경사노위 의결 체계까지 고치겠다는 엄포를 놓고 있다.

얼마 전 사회적 대타협기구가 택시 카풀 문제에 대한 ‘극적 합의’를 이룬 것은 이 정권이 사회적 대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이 기구가 합의한 것이 무엇인지를 해설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출퇴근 시간 중 2시간’이란 부분만 비교적 분명할 뿐 나머지는 사실상 앞으로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는 내용들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합의’일까? ‘합의했다’는 행위를 통해 4차산업혁명 시대의 산업구조 변화를 위한 뭔가를 했다고 말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과거 IT업계의 중흥을 이끈 어떤 인물이 소비자를 제쳐놓고 무슨 사회적 대타협이냐고 한 마디 했다던데, 이 합의를 향한 ‘택시 소비자’들의 반응을 보면 이런 정치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가 명확해진다. 다들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택시와 카풀 서비스 모두를 이용할 수 없게 됐다는 말만 한다. 언론은 ‘택시 소비자’들의 반응을 인용해 택시 기사들의 불법영업과 불친절 등등을 지적한다. 월급제를 도입할 경우 이렇게 서비스 정신이 없는 택시기사가 태업을 하는 경우 이를 어떻게 통제하겠느냐는 주장에 이르면 ‘소비자’의 시선은 ‘고용주’의 그것과 겹치게 된다.

개혁의 당위가 없는 선거공학은 바로 이런 여론의 시선을 인정한 채 모두에게 이득을 안겨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개혁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정치는 발언권이 없는 개혁의 수혜자들을 정치의 공간으로 끌어 들이고 상층정치를 좌우하는 중간층에게 개혁을 위해서라면 손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을 쉽게 포기할 때 집권세력의 정치는 권력재생산-기계로 전락한다. 지금 우리는 막 그러한 문턱을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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