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오래전 일이다. 4~5년 전, 동요 프로그램을 2년여 넘게 제작했던 시절이 있었다. 동요프로그램을 맡게 된 건 ‘부모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동요를 듣지 않는다고 하지만 동요를 들을 기회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청취자 입장에서 동요를 매우 좋아하지만 자주 들을 기회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언젠가 운전 중 자동차에서 우연히 아이들과 동요 프로그램을 듣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동요를 따라 부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동요를 보급하려면 ‘어른이 듣는 동요’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점에 착안하여 기획한 것이 <파란마음 하얀마음>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파란마음 하얀마음>이란 동요는 부모와 어린이의 정서를 연결할 수 있는 익숙한 동요가운데 하나다. MC도 부녀, 혹은 모자를 기용하고자 했는데 지역에서 방송 진행이 가능한 가족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 아침 8시 30분에 시작하는 원음방송 <아침의 향기 장리나입니다>. 김사은 PD는 이 프로그램에서 동요을 방송하고 있다.
아동복지학 교수인 L에게 프로그램 취지를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더니 아들만 괜찮다고 한다면 함께 진행해 보겠다는 긍정적인 대답이었다. 처음에 자신없어하던 L교수의 아들 연호는 출연료가 있다는 말에 OK! 어린이를 금전으로 유혹(?)한 점이 다소 마음에 걸리지만 어린이도 노동의 신성한 대가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방송에 돌입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대로 초등학생과 함께 방송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틈만 나면 마이크 옆에 있는 모니터로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는 연호를 못견뎌하는 것은 PD인 나보다 엄마였다. 달래고 어르고, 별별 수를 동원하며 녹음을 마치고 나면 녹초가 되기 일쑤.(이런 점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모든 PD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게다가 동요는 왜 이리 짧고(30초짜리 동요도 부지기수다) 동요 음반은 왜 이리 부족하며, 음질은 또 왜 그렇게 떨어지는지……. 한 시간 짜리 방송을 녹음하는데 넉넉히 두세시간은 걸리는 강행군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어색하던 모자간의 대화도 자연스러워지고 방송이 무르익어갔지만 한해를 넘기면서 5학년으로 진급한 연호는 방송을 그만두게 되었다. 사실 모자(母子)에게는 그 1년도 긴 시간이었을게다. L교수는 방송국을 오가는 시간동안 아들과 가장 진지하고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했다.

다음 진행자를 물색하던 중, 작가의 제안으로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 현범과 내가 진행하게 되었다. 현범이도 연호처럼 방송에 앞서 컴퓨터 앞에서 꼼지락거리며 애간장을 녹이더니 1년 후 제법 의젓하게 방송을 진행했다. 이후 파란마음 하얀마음은 제작자가 바뀌면서 대학생 언니가 진행을 하다가 제작상의 어려움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만든 동요프로그램이 잘 만들어진 프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엄마와 아들, 아빠와 딸, 혹은 할아버지와 손녀가 진행하는 동요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 동요프로그램 '파란마음 하얀마음'을 진행하고 있는 김사은 PD와 아들 현범군.ⓒ김사은
내가 만들고 싶은 <파란마음 하얀마음>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 이야기처럼 구수하고 편안한 프로그램, 할머니가 조곤조곤 일러주시는 지혜의 옛 이야기, 아빠와 아들이 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주며 나누는 일상적인 이야기들, 그런 따뜻함을 담아내고 싶었다. 제3대, 제4대, 제5대…… 진행자 가족이 계속 이어져서 동요 속에서 끈끈한 가족의 정을 그려내고 싶었다. 동요를 만드는 사람들의 맑은 마음을 사회와 연결하고 싶었다.

<파란마음 하얀마음>에서 못다 푼 동요의 회한을 매일 아침 9시30분, <아침의 향기 장리나입니다> 프로그램에서 한곡씩 틀고 있다. 처음에 “가요프로그램에서 웬 동요?”하며 ‘쌩뚱맞다’고 생각하던 청취자들도 지금은 함께 즐기고 있다. 어느 노래보다 끈끈한 결속력을 가진 노래는 바로 동요다. 어린이와 쉽게 친해지는 방법은 동요를 많이 불러주면 된다. 부모와 어린이가 함께 동요를 부르는 집은 틀림없이 화목한 집안이다.

동요에 관심이 많은 지역신문사 사장 출신의 L선배는 “요즘 동요 확산 운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알고보니 노래방에서 ‘동요 불러제끼기’ 운동을 실시하고 있다나……. 자동차 안이건, 노래방이건, 동요가 많이 많이 불려지면 좋겠다. 라디오는 동요를 보급하기에 좋은 미디어다. 다시 기회가 된다면 ‘풋풋함이 살아있는’ 동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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