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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어려워진 '중재자'의 길'절충안' 내놨지만 북미 오히려 협상재료로 쓴 듯
김민하 / 저술가 | 승인 2019.03.04 08:59

북미정상회담의 결렬 이후 보수언론 등의 태도는 예상대로인 것 같다. 제각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사건 자체를 성실히 다루는 일은 외면하고 있다. 회담 직전까지는 북핵 문제에 관심없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쉽게 양보해 북한이 결국 핵보유국이 될 수 있어 우려된다고 하더니 이제는 원칙을 지킨 미국에 박수를 보내며 만세를 부른다. 그러면서 북한을 향해서는 영변 외의 핵 시설들의 리스트를 제출하지 않으면 비핵화 협상은 앞으로도 불가능할 거라며 이제는 개심을 해야 한다는 주문을 내놓고 있다. 이런 시각들은 지금까지 진행돼 온 비핵화 관련 논의의 맥락을 그야말로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비핵화 해법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대립은 단계적 해법을 추구할 것이냐 일괄 타결을 할 것이냐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해법이 안 나와 부시 오바마 정권 내내 경직된 북미관계는 출구를 찾지 못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최대의 압박과 관여’란 슬로건이 등장해 다시 협상의 길이 열렸지만 앞서의 구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상징되는 대북 매파들은 이른바 ‘리비아식 해법’을 들고 나와 북한의 미래핵까지 완벽하게 제거하고 이를 검증할 수 있어야 보상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핵무기와 이의 운반수단인 ICBM을 북한 밖으로 갖고 나와서 해체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당연하게도 이런 주장에는 북한이 응하지 않는다. 북미협상에 성과가 나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외교적 쟁점들에서까지 트럼프 대통령과 갈등을 겪던 렉스 틸러슨이 물러난 이후 등장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에 요구할 내용을 좀 더 구체화 했다. 다른 복잡한 쟁점은 추후에 논하더라도 ’리스트’와 ‘일정’을 먼저 요구하기로 한 것이다.

북한은 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미국과 적대관계인 한 핵 신고는 사실상 무장해제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철회가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핵 무기 및 관련 시설에 대한 신고와 폐기를 요구하는 것은 “날강도 같은 요구”라는 게 북한의 입장이다. 여기서 쟁점이 좁혀지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는 걸로 보였지만 스티브 비건 국무부 대북특별정책대표가 협상을 맡으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올해 초 스탠퍼드 대학 강연을 통해 비건 대표가 밝힌 협상의 얼개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가장 구체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초기 협상의 대상은 ‘영변 플러스 알파’로 좁혀졌고 포괄적 핵신고의 시점은 늦출 수 있다고 했다. 대신 비핵화의 개념 자체에 대량살상무기와 중단거리미사일이 모두 포함되고 비핵화가 완료되면 미국이 경제지원을 할 수 있다고도 했다. 즉, 협상의 시작은 영변 핵 시설에 관한 것으로 하되 포괄적 신고를 뒤로 늦춤으로써 단계적 해법을 수용하고 대신 최종 단계에선 완전한 의미의 비핵화가 이뤄지는 로드맵을 제시한 것이다.

북한이 2차 북미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이런 합의의 얼개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북미간의 이견이 실무 협상 단계에서도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 밝혀진 바와 같이 북한은 이 단계에서도 영변 핵 시설 폐기를 대가로 일부 유엔 제재완화를 주장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제재완화는 영변 핵 시설 폐기 단계가 아니라 그 다음이라고 볼 수 있는 신고 단계에서 줄 수 있는 보상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북한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이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 한국 정부이다. 미국은 신고 없이 제재 완화가 없다고 하고, 북한은 미국의 안전보장 조치 없이 신고는 없다고 하니 각각의 쟁점에서 절충을 시도한 것이다. 안전 보장 조치에 관해서는 북미 양자 간 종전선언을 유도했고 제재 완화와 관련해서는 금강산 관광 등 남북경협의 제재 예외를 제시했다. 서로가 원하는 것에 미진한 수준이지만 최대한 간극을 좁혀 보려는 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만일 2차 북미정상회담이 이 궤도를 따라 진행됐다면 타결이 불가능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양쪽 모두 이 같은 절충안으로 협상이 귀결되는 상황을 비켜 갔다는 것이다. 이어지고 있는 미국 언론의 보도를 보면 정상회담 과정에서 이 궤도를 벗어나 일괄타결로 쟁점을 옮긴 것은 트럼프 대통령인 듯 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직접 모든 핵무기 완전폐기와 제재완화의 교환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많은 전문가들이 진단하듯 러시아 스캔들과 여성들과의 부적절한 관계 및 입막음 사건 등 때문에 국내 정치적 환경이 악화된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미진한 합의보다는 결렬이, 결렬 보다는 빅딜이 나은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트럼프 대통령이 ‘미진한 합의’를 우려하게 된 상황 자체를 짚어봐야 할 필요도 있다. 대북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변 핵 시설에 대한 폐기를 이끌어 낸다면 그것 자체를 상당한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북한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대로 그런 합의가 된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 리용호 외무상 등이 주장한대로 영변 핵 시설의 완전한 폐기와 미국 전문가들이 이에 참여하는 형태의 검증이 합의됐다면 이후 추가 협상을 통한 비핵화 전망은 상당히 밝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은 북한의 영변 핵 시설 폐기에 대한 입장이 불분명했다고 거듭해서 주장하고 있다. 이는 물론 협상 이후 자신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일환이기도 하겠으나 아무런 맥락이 없는 것으로만 보기도 어렵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북한은 영변 핵 시설 폐기와 검증 수용을 최대치로 제시했으나 협상을 통해 최대한 영변 핵 시설을 지키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식이다. 영변 핵 폐기의 최대치와 제재 완화를 짝지은 다음 미국이 이를 거부하면 남측 중재안 정도를 받아들이면서 영변 핵 폐기 쟁점에서도 후퇴하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쟁점을 좁혀가는 게 아니라 빅딜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런 전략이 실현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과 미국이 모두 우리 정부가 제시한 절충안이란 선택지가 있다는 점을 알았으리라는 거다. 청와대가 북한과 미국의 협상 라인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북미 간 종전선언과 남북경협 제재 예외 인정이라는 절충안을 제시했을 가능성은 작다. 양쪽에 각각 상대가 이 정도 절충안이면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신호를 줬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과 미국은 이 절충안으로 수렴되는 협의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선택지 자체를 하나의 협상 수단으로 활용하려 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한국 정부가 ‘패싱’된 것이다.

이 상황을 풀기 위해 하루 빨리 대북특사를 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청와대가 상황 파악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 파악도 상황 파악이지만 이미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의 협상 구도를, 다시 올해 초 비건 대표의 스탠포드 강연 이전으로 되돌려 놓은 조건 자체가 문제로 보인다.

어떤 이들은 실패한 북미회담이 과거 냉전의 종식을 이끌었던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의 레이캬비크 회담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북한은 그때의 소련이 아니고 미국도 그때의 미국이 아니다. 판이 완전히 깨지지 않은 것에서 의미를 찾는 이들도 있지만 협상을 진전시킬 수 없다면 판을 깨지 않은 의미도 없는 것이다. 애초에 청와대가 제시했던 절충안에서 조금 더 북한이 양보하는 것, 즉 영변 핵 시설 완전 폐기와 검증을 수용하고 남북경협 제재 예외 인정 및 추가 안전보장 조치를 교환하도록 양쪽을 설득하는 게 그나마 가능한 현실적 대안이 아닐까 한다. 온갖 악의와 냉소를 뚫고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이다.

김민하 / 저술가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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