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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갈림길에 선 ‘마지막 무관생도들’, 엇갈린 선택과 영욕의 삶[미디어비평] 톺아보기
meditator | 승인 2019.03.04 10:10

3.1 운동 100주년이다. 유관순 열사, 그리고 일제시대 인물인 엄복동을 독립운동과 연관시킨 영화 등이 개봉되는가 하면, 방송사에서도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다큐 및 작품들이 방영되었다. 100년 전 그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총칼을 뚫고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의 우리. 선열들의 뜨거운 독립에의 의지와 열망을 되새기며, 동시에 100년 전 그날 그곳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지난 2월 25일과 3월 1일 양일에 걸쳐 2부작으로 방영된 MBC 3.1절 100주년 특집 다큐드라마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바로 이런 반추로부터 시작된다.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였던 이들의 서로 다른 선택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던 선열들의 신념어린 삶을 역설적으로 조명하고자 한다(이 다큐는 이원규 씨의 장편소설 『마지막 무관생도들』를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피를 나눈 맹세- 첫 번째 엇갈림 

MBC 3.1절 100주년 특집 다큐드라마 2부작 <마지막 무관생도들>

1896년 대한제국은 무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를 만들었다. 이응준, 홍사익, 지청천. 이들이 무관학교의 마지막 생도들이다. 1909년 위태로워져가는 나라, 무관학교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문을 닫게 되고 무관생도들 중 50 명이 일본의 육군 중앙 유년학교로 보내졌다. 그리고 1910년 강제합병 소식이 전해지고, 일본에 남겨진 무관생도들은 아오야마 묘지에 모였다. 

다함께 천황궁 앞에서 자결하자며 이응준 등이 무조건 싸우자며 결의를 다지는데, 홍사익은 때를 기다리자 했고, 지청천 역시 홍사익의 의견에 따라 일본군과 싸우려면 지휘관이 필요하다고 이곳에서 일본의 선진 지식을 습득하며 조국이 부를 때까지 기다리자 했다. 이들은 결의를 다지기 위해 다시 육사 23기였던 김경천의 주도 아래 '우리 민족이 떨쳐 일어나는 날 다 함께 모이자’며 요코하마 한 술집에 모여 서로의 피를 나눈 술잔을 마시며 피의 맹세를 했다. 이들이 이때 정한 암호는 '요코하마'.

1919년 온 민족이 떨쳐 일어난 3.1 운동, 김경천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그래서 피를 나눈 동지들에게 '요코하마'라는 단어가 들어간 전보를 보내고 지청천이 합류했다. 육군 현역 장교였던 두 사람의 탈출에 일제는 체포망을 좁혀갔지만 두 사람은 그 허를 찔러 무사히 조국을 탈출하여 서간도의 신흥 무관학교로 갔다. 

반면 기다려도 오지 않았던 이응준과 홍사익. 당시 홍사익은 일본 육사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고, 이응준 역시 홍사익과 다르지 않은 선택을 했다. 이렇게 피를 나눈 맹세의 길은 서로 갈라졌다. 

조국 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족할 때는 이 넓은 만주 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을 맹세합니다.    - 지청천 

독립군과 그 독립군을 진압하는 장교로 마주선 동지들 

1919년 6월 이회영 등이 사재를 털어 만든 항일무장투쟁 교육기관 신흥무관학교. 여기에 육군 현역장교 출신인 김경천, 지청천 두 사람의 합류로 독립투쟁의 기세는 불타올랐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북간도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신동천과 함께 김경천, 지청천은 '남만 삼천'이라 일컬어졌으며, 이들의 합류로 독립투쟁은 한 단계 승화된다. 일본군을 나오며 군 교재와 지도를 갖춰 온 지청천 덕분에 현대적 군사지식과 지도를 얻게 되었으며, 이런 전문적 군사지식에 따라 신흥무관학교는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편제에 따라 14시간 훈련과 학과를 병행하는 체계를 갖춰 나갔다. 

이들 졸업생은 대부분 만주지역 독립군 부대의 교관과 장교로 활약했고, 이들이 이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둔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이들 '남만 삼천'은 지청천은 서간도로, 김경천은 러시아 연해주로, 신동헌은 북간도로 흩어져 독립운동의 외연을 넓혀가며 각 지역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반면 홍사익과 이응준은 일본군이 되었다. 홍사익은 만주사변에서 공을 세우고 관동군 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가 접한 조선 항일조직의 서류에서 그는 한때 동지였던 지청천의 이름을 발견했다. 또한 어느 날 인편을 통해 지청천은 '친구여 요코하마를 기억하는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며 그의 투항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군으로 승승장구하던 홍사익은 '친구여 요코하마를 기억하는 이는 더는 내가 아니네'라며 지청천의 청을 거절한다. 

장부가 응당 취하고자 하는 건
만고에 떨칠 이름인데
어찌 하찮은 망아지 구유에 기대어...
풍운은 아직 그치지 않고 눈보라 휘날리니
어찌 큰 민족을 세울 용사를 얻을 수 있으랴     -김경천 <경천아일록> 

소비에트 혁명으로 인한 비극적 생애, 김경천

MBC 3.1절 100주년 특집 다큐드라마 2부작 <마지막 무관생도들>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집안, 사직동 일대에 1000여 평의 집터를 가진 집안. 하지만 가장 김경천이 독립을 위해 조국을 떠나고 남은 가솔들은 그 가옥을 처분하여 근근이 살아가야만 했다. 

러시아 연해주로 온 김경천은 수청 고려 의용대를 만들어 우리 이주민들은 물론 그 지역 토착민들을 괴롭히는 마적들을 토벌하는 등 혁혁한 성과로 '백마 탄 김장군'으로 칭송받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숨쉬기조차 힘든 그곳의 사정'을 <경천아일록>으로 남겨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비견되는 전쟁기록의 산 증인이 되었다. 

하지만 강대국의 정세에 휩쓸리는 우리의 운명이 그렇듯, 김경천 장군의 생애 역시 그 비극에서 비껴 서지 못했다. 정권을 잡은 스탈린의 숙청 과정에서 조선인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연해주의 고려인 사회 지식인과 지도층 인사들 다수가 체포되었으며, 김경천 장군 역시 블라디보스톡에서 체포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영향에서 조선인을 분리하고자 한 소련의 정책에 따라 18만 명의 조선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과정에서 김경천 장군도 카자흐스탄의 집단농장으로 강제 이주됐다. 하지만 집단농장 이주도 잠시, 1939년 다시 '인민의 적'이란 명목으로 카라간다 정치범 수용소에 8년 금고형에 처해졌고, 이어 모스크바로 다시 시베리아 코틀러스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철도건설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백마 탄 조선의 나폴레옹’이라 불렸던 독립의 영웅 김경천 장군은 그렇게 소비에트 혁명의 희생자가 되어 1942년 러시아 북부철도 부설 수용소 병원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당시 그의 병명은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 질환,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친일의 결말, 이응준과 홍사익 

MBC 3.1절 100주년 특집 다큐드라마 2부작 <마지막 무관생도들>

일본군 고위장교가 된 이응준은 가야마 다카토시로 창씨개명을 하고 매일신보 등의 강연회에서 충성을 강변하는 등 일제에 앞장선다. 용산 조선군 사령부 대좌까지 지내던 중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원산항 병참 책임자로 있던 이응준은 '조선인으로 돌아간다'며 원산을 탈출한다. 

하지만 미군정청은 해방 후 칩거하던 그에게  조선 임시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장직을 맡긴다.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던 그는 하지만 건군의 주역이 되고 초대 육군 참모총장 등의 직위를 역임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할 당시 필리핀 포로 수용소장으로 있었던 홍사익은 그해 12월 B급 전범이 되어 재판을 받는다. 당시 재판을 받던 22명의 장성 중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홍사익, 그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진다.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수재로 입신양명의 길을 걸었던 홍사익. 그의 최후는 일본군의 전범이었다. 

이응준 등 심지어 김원봉조차 조국 건설에 필요한 인물이라며 구명 운동을 펼쳤지만 항소를 거부했던 그가 형장으로 가며 부탁한 건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로 시작하는 시편 51편. 그렇게 조선인으로 일본인과 동등하게 살고자 했던 일본군 대좌 홍사익은 형장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응준과 홍사익은 반민족 친일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이 올랐다. 

마지막 무관생도들, 그후 

충칭 임시정부로 간 지청천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어 국내 진공 작전인 독수리 작전을 주도했다. 천황의 항복, 태극기, 광복군기를 앞세워 귀국하려던 지청천. 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개인 자격으로 28년에 귀국한 지청천 장군은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해방 후 청년단체 규합에 힘썼다. 

일제 합방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던 이건모는 퇴교 후 조선총독부 서기가 되었다. 일본군 장교가 되었던 이종혁은 자신으로 인해 독립군 투사가 죽음에 이르는 걸 목도하고 항일독립투쟁에 헌신,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았다. 

45명의 마지막 무관생도들 중 단 5명만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리고 그중 7명이 반민족 행위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남은 이들 중 일본군 장교가 13명, 관료가 6명, 은행 직원이 3명, 교사가 4명 등이다. 일제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젊은이들의 서로 다른 선택. 3.1운동 100주년에 독립 운동을 했던 저 다섯 명의 선열들의 삶, 그 지난했던 선택이 더더욱 고귀하고 존경스러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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