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KBS가 방송인 김미화씨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겠다고 밝혔다. 트위터(@kimmiwha)에서 'KBS에는 진짜로 블랙리스트가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를 했을 뿐인 김씨를 상대로 형사고소까지 한 것은 지나친 일이었으니, KBS의 고소 취하는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KBS가 밝힌 '고소 취하 이유'가 재미있다.

"애초 김미화 개인에 대한 대응 차원이 아니라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법적으로 증명받기 위해 고소를 제기한 것이었으며, 이제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인된 이상 공영방송으로서 대승적인 차원에서 소를 취하하기로 했다."

KBS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인됐다니,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하긴, '수신료 인상을 본격 추진해야 하는 이 시점에, 김미화 고소로 시민들의 비난이 너무 많아 부담스럽다'는 속내를 회사 공식 입장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 트위터에서 블랙리스트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가 KBS로부터 고소당한 김미화씨는 10월 26일 네번째 경찰출두를 앞두고 오전 10시 20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곽상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재정 국민참여당 대표의 KBS 출연이 석연찮게 취소됐다는 내부 구성원들의 폭로가 나오고, KBS의 한 간부가 이 대표를 '종북 내지 친북인물'이라고 표현해 논란이 일었던 게 불과 10월 말인데, '사회적 공감대가 확인됐다'는 말은 너무 면구스럽지 않은가.

당시 새 KBS노조 라디오PD 조합원들이 "남북문제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전 통일부 장관인 이재정 대표만의 단독 인터뷰는 왜 안되는 것이냐"며 '데스킹의 부당함'에 문제제기를 한 것과 관련해 KBS는 "(출연취소는) 제작진 내부의 정상적인 데스킹 과정에서 빚어진 오해이자 해프닝"이라는 동문서답식의 해명만 늘어놓았었다.

▲ 김미화씨 고소와 관련해 KBS의 입장을 상세히 전달한 7월 6일 KBS 뉴스9의 < KBS "김미화 '출연금지 문건' 주장 법적 대응> 캡처.
KBS 블랙리스트 의혹이 불거진 게 이 뿐인가? KBS가 김미화씨를 고소한 7월에는 개혁 성향의 문성근, 진중권, 유창선씨도 KBS로부터 출연을 거부당했다고 밝혔으며 "(정부에) 쓴 소리를 하는 인물들을 제외시키는 무형의 블랙리스트는 있는 것 같다" "블랙리스트는 '문건'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존재한다"는 내부 구성원들의 발언도 이어졌다.

8월 말에는 김미화씨 후원행사의 연출을 맡은 탁현민 성공회대 겸임교수의 KBS 출연이 취소됐다. 포항KBS의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 신설될 문화코너 패널로 섭외됐으나 윗선에서 '김미화씨를 지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출연시킬 수 없다'며 출연을 취소시켰다는 것이다.(▷관련기사: KBS, '김미화 지지'한 탁현민 교수도 출연 취소) 당시 나는 취재원 보호 차원에서 전후 사정을 자세히 적을 수 없었으나, 이 어이없는 사건의 이면에는 이와 관련된 이들의 눈물과 자괴감이 배어 있었다.

9월에는 최상재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이 "2009년 봄 쯤에 KBS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로 돼 있다가 출연 전날 작가로부터 출연 취소 통보를 받았다. 윗선에서 (나를) 기피한다는 뉘앙스였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김미화씨가 의문을 제기했던 7월부터 8월, 9월, 10월까지 'KBS 블랙리스트' 의혹이 제기되지 않은 달이 없다. 공영방송으로서 대승적인 차원에서 소를 취하했다는 KBS. 그런데, 지금의 KBS가 공영방송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는지 의문이다.

김미화씨는 KBS의 '고소 취하' 보도자료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본의와는 다르게 사회적 파장이 일어난 데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고소취하가 이뤄진 만큼, 향후 이번일에 대해 불필요한 오해가 더이상 확대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긴시간, 제가 힘들어 할 때마다 용기주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4개월여 동안, 거대 언론권력을 상대로 싸우느라 많이 힘들었을 김미화씨. 앞으로는 그를 경찰서 앞이 아니라 브라운관 속의 '웃음주는 코미디언'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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