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미디어스

Updated 2019.4.22 월 19:07
상단여백
HOME 오피니언 기고&칼럼
삶이 놓인 자리[여해, 바다와 같아라]
백종훈 원불교 교무 | 승인 2019.02.08 09:20

[미디어스] 장교로 이십여 년의 군 생활을 마무리 한 아버지는 예비군 중대장이란 익숙한 길을 마다하고 낯선 민간 기업에서 자리를 구하셨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끝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그 시절, 군 출신은 사회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들어간 회사마다 오래 버티지 못하셨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어려움은 더 깊어갔다. 그러나 두 아들의 사립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일을 멈출 수 없었다. 

2001년 대학 3학년 겨울방학. 일거리를 찾던 나는 인력파견업체에 근무하시던 아버지 소개로 서울 도시철도공사에서 시급 2만 5천 원짜리 일을 하게 된다. 지하철 5호선 선로 세척 작업이다. 막차가 끊긴 이른 새벽이면 역사와 차량 내부 청소가 시작된다. 

나는 헬멧에 작업복을 갖춰 입고 철로 위에 섰다. 3인 1조로 대형을 갖췄다. 뒤에는 물을 실은 노란색 전동차가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바짝 따라왔다. 거센 물줄기를 레일에 뿌리면 찌든 때가 벗겨지는 동시에 시커먼 먼지가 피어오른다. 벽면으로 호스를 향하자 터널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중금속 분진에 갇힌 꼴이다. 더럭 겁이 났다. 

지하는 따뜻했고 복장은 갑갑했다. 금세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같이 일하는 청년은 땀범벅이 싫었는지 마스크만 쓰고 보호의를 벗었다. 어둠을 뚫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앞서 나가던 그가 갑자기 고꾸라졌다. 

사진 출처 = www.freeqration.com

물이 흥건한 바닥에서 미끄러진 건지, 끌고 가던 줄에 다리가 걸린 건지, 아니면 스텝이 꼬인 건지 아무튼, 옆 동료가 황급히 돌아서서 뒤따라오는 전차를 향해 어서 서라고 소리 지르며 팔을 크게 휘휘 저었다. 제동거리가 긴 물탱크차를 제때 멈추지 못했다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다행이 가벼운 찰과상에 그쳤다.

휴식시간, 조장은 새벽에 일하고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당신 일상을 털어놓았다. 아내도 투잡을 뛴다고 했다. 부부가 그러면서 두 아이를 기른다는 게 안타깝고 또 과연 가능한가 싶기도 했다. 

옆을 둘러보니 설비 개보수공사가 한창이다.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정규직 근로자들이 도시철도공사 전 고위직들이 세운 외주업체에 비정규직으로 재취업해서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줄고 복지도 축소되었다. 내가 일당 받고 한, 레일 세척 일도 이전엔 누군가의 안정적 벌이였을지 모른다. 

서민들의 고용조건 악화를 전제로 한 공공부문 경영효율화만이 최선이었을까? 비교적 경쟁이 덜한 도시철도공사가 그랬을진데,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기업에서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잔혹한 현실은 말할 것도 없다.     

2시간여의 작업을 마친 세 남자는 터널에서 나와 직원 샤워장으로 향했다. 온 몸에서 검은 물이 흘러내렸다. 몸을 닦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방진마스크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일마치고 나니 배가 출출했다. 아까 선로에서 넘어졌던 청년이 한턱을 내겠다고 한다. 사나이 셋이 밝은 조명아래서 뽀얀 도가니탕 한 그릇씩을 깨끗이 비워냈다. 몸도 마음도 훈훈했다.

2017년 5월 서울시 산하 ‘서울 메트로’와 ‘서울 도시철도공사’ 노사는 아웃소싱업체에 맡겼던 4개 분야 안전업무를 직영화하기로 합의했다. 그해 마지막 날에는 한 발 더 나아가 무기계약직 정규직화에 노사가 뜻을 모았다. 이런 변화의 시작이 2016년 5월 구의역 사고라는 사실이 너무 뼈아프다.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열차에 치여 사망한 외주업체 비정규직 직원은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위험의 외주화 도급’ 제한과 ‘사업주의 안전조치 위반에 대한 형사처벌 강화’를 골자로 하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뒤에는, 태안화력발전소 협력업체 비정규직 김용균 씨의 죽음이 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숨져야 안정된 일자리, 안전한 일터가 이루어질까. 얼마나 많은 부모형제가 울부짖어야 할까. 우리 사회는 정령 피와 눈물 없이 발전할 순 없는가. 

지리산 기슭에서 찬바람이 불어온다. 요사채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빚는 소리에 마음이 아리다. 안온한 내 삶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성냥을 그어 심지에 불을 놓는다. 환히 빛나는 불꽃 아래로 초가 녹아 흐른다. 향을 살라 더 나은 세상의 밑거름이 되어 이름 없이 죽어간 모든 분들께 정성을 올린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webmaster@mediaus.co.kr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2길 22 가든빌딩 608호 (우) 07238  |  대표전화 : 02-734-9500  |  팩스 : 02-734-2299
등록번호 : 서울 아 00441  |  등록일 : 2007년 10월 1일  |  발행인 : 안현우  |  편집인 : 안현우  |  개인정보책임자 : 윤희상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희상 팀장
Copyright © 2011-2019 미디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mediaus.co.kr

ND소프트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