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도망자>가 대단히 재밌어졌다. 시청자들의 평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초반에 연기가 미숙하다는 억울한 지적을 들었던 비에 대한 평가까지도 달라졌다. 비는 요즘 네티즌 비호감의 대표주자격인데 그런 그에 대한 평가까지도 달라졌다는 건, 드라마 <도망자>의 힘이 상당히 강렬하다는 소리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도망자가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초반에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원 없이 도망 다니는 모습을 보여줬다.

헐리웃이라면 재밌게 도망 다닐 수도 있다. 돈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는 그게 어렵다. 그저 두 사람이 뛰어다니다 치고받고, 또 뛰어다니다 치고받는 장면만 계속 반복됐을 뿐이다.

이러면 상당한 수준의 액션 마니아가 아닌 이상 극에 몰입할 수가 없다. 극장 영화 흥행도 무작정 볼거리만 계속 이어지는 것보다 드라마가 밀도 있는 작품이 더 크게 히트하는 경향이 있다.

제작비를 많이 들인 극장 영화까지도 그런데 별로 볼거리를 줄 수 없는 한국 드라마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도망자>에선 정두홍 무술감독과의 이벤트 액션을 비롯해 몇 차례 반짝이는 액션 장면이 있었지만, 너무 늘어지는 추격전과 시도 때도 없이 양적으로 압도하는 액션들 때문에 그 장점이 다 바랬다.

<본> 시리즈나 <아저씨>처럼 전격적인 단타액션이 호응 받는 시대다. 늘어지는 주먹싸움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차라리 몇 차례 공들인 액션으로 압축하는 대신에 질적인 임팩트를 주는 방식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요즘 들어 <도망자>는 늘어지게 도망 다니지 않는 대신에 인물들 간의 관계에 밀도가 생기고 있다. 드라마가 치밀해지는 것이다. 그러자 작품에 재미가 생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에 큰 탄력을 못 받는 것은 아직까지는 중장년층 주부가 선택하기엔 정신 사나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도망자>는 젊은 층에겐 늘어지고, 중장년층에겐 난삽한 작품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젠 늘어짐을 잡으면서 젊은층에게 어필하고 있지만, 중장년층에겐 여전히 낯설다. 중장년층은 기본적으로 차분한 전개의 드라마를 선호한다. 몰입할 수 있는 인간적인 관계 전개도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중장년층 주부에게 드라마란 설거지하면서, 반찬거리 다듬으면서 힐끔힐끔 봐도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심지어 한 회 정도 빼먹어도 흐름을 따라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어야 한다. 그러기엔 <도망자>는 너무 빨랐고, 복잡했다. 게다가 자막까지 나왔다! 집안일 하는데 자막 방송이 나오면 ‘대략난감’일 뿐이다.

그래서 <도망자>는 평가절하 됐고, 볼거리에만 치중하다 망한 대다수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같은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도망자>는 절대로 그렇게 무의미한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은 한국 드라마로는 대단히 특별한 이야기를 보여주며 어떤 특별한 성취까지 이루고 있다.

이렇게 경쾌한 첩보액션극이 이 정도의 스케일로 다뤄지는 것 자체가 우리 드라마에서는 하나의 사건이다. 게다가 그 표현이 ‘촌스럽지’ 않다. 어떤 점에선 <아이리스>보다 더 높은 평가도 가능하다.

<아이리스>가 성공했던 건 이야기가 착착 감기는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적당히 질척질척했다. 이병헌의 인간적인 이야기, 이병헌과 김태희, 김소연의 애절한 삼각관계, 친구 간의 의리와 배신 등 <아이리스>엔 인간적으로 몰입할 만한 이야기와 캐릭터가 있었다.

반면에 <도망자>는 극히 건조했다. 난 이 점에 점수를 높이 주고 싶다. 그러나 건조한 작품은 인간적인 몰입을 유도하지 않기 때문에 시청률 경쟁엔 불리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인 비의 성격도 극히 불투명하며 지나치게 ‘쿨’했다. 모든 것을 다 처리하는 척척박사로서 위기감도 주지 않았다.

요즘 들어 비가 조금씩 자기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비와 이나영 사이의 관계도 진전이 있다. 속을 알 수 없는 만능 척척박사 만화주인공에서, 마음도 있고 위기에 빠지기도 하는 말하자면 ‘사람’ 같아진 것이다. 이러면 몰입도가 높아지게 된다. 이것이 재미있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다. 비의 연기에 찬사가 늘은 것도, 캐릭터의 몰입도가 커진 것과 관계가 깊다. 물론 또 다른 이유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극의 밀도가 높아진 때문이다.

언제까지 막장드라마나 아니면 적당히 질척질척한 인간관계의 드라마만 볼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도망자>의 시도는 신선하다. 이 작품이 시장에서도 성공을 거둬서 보다 다양한 작품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길 기대한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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