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설이다. 하지만, ㅅ자만 들어도 골이 지끈지끈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어느 집안의 ‘며느리’라는 위치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다. 역귀성에, 명절 대신 여행이라며 트렌드가 바뀌어간다 하지만, 집안의 행사로서 명절의 전통은 강고하게 지탱되고 있다. '며느리 잔혹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1996년의 명절 특집극 <곰탕>을 다시 보며 며느리로서의 삶에 대해 짚어보자.

1996년이면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다. 명절 특집 드라마가 융성하던 시절, SBS는 <울밑에 선 봉선화>, <노란 손수건>, <어여쁜 당신> 등 전통과 여성의 갈등을 작품에 풀어온 박정란 작가와 <천국의 계단>,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이장수 피디가 의기투합하여 2부작의 <곰탕>을 설 특집극으로 만들었다. 김혜수를 타이틀롤로 하여 김용림, 류현경, 류시원, 한재석, 정우성 등 당시의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출연했던 이 드라마는 작품성을 인정받아 뉴욕 페스티벌 TV부문 특별상, 휴스톤 국제영화제 TV부문 금상을 받으며 '한국적 여인상'을 대내외에 알렸다.

열세 살의 민며느리

SBS 설 특집극 2부작 <곰탕>

배경은 1919년 고종이 돌아가시고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불붙던 시절의 서울이다. 양반이라지만 식구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살림살이, 이제 열세 살이 된 딸 순녀는 충청도 부잣집이라는 정씨 댁으로 쌀 삼백 섬에 '민며느리(빈곤한 가정의 딸로서 대체로 10∼12세 때 데리고 와서 양육하여 혼기가 되면 며느리로 삼는 제도)'로 들어가게 된다.

가마를 타고 며칠 걸려 도착한 시댁, 목욕재계하고 어른들께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민며느리'인 순녀가 한 일은 이 집에서 남자들을 먹이기 위해 끊이지 않고 만든다는 곰탕 재료를 손질하는 일, 한겨울 뒷마당에서 찬물에 손을 담가 소뼈며 부속물을 다듬는 것이었다.

겨우 곰탕꺼리를 마련해 가마솥에 끓이며 행랑댁과 함께 어두운 부엌 마루에서 바가지에 담긴 밥을 먹던 며느리 순녀. 그런데 시어머니가 들이닥쳐 그녀의 옷을 벗겨 몸을 검사한다. 손이 귀한 집에 겨우 아들 하나를 생산하여 내내 집안 어른들께 혈연에 대한 부담을 짊어졌던 시어머니는 그런 그녀의 쌓인 한을 고스란히, 이제 겨우 초경을 마친 순녀의 몸에 토해낸다. 아들을 많이 낳아야 한다며.

남편이 없어도 며느리

SBS 설 특집극 2부작 <곰탕>

그렇게 3년을 지냈고, 드디어 혼례식을 치렀다. 하지만 첫날밤을 치르자마다 정씨 집안 외동아들인 남편 인성은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고향이 서울인 순녀를 놔두고.

순녀는 남편도 없는 시댁에서 점차 부풀어 오르는 배를 부여안고 여전히 곰탕을 끓이랴 시부모를 봉양하랴 손이 마를 날 없이 며느리의 역할을 다하며 세월을 보낸다. 드디어 졸업을 하고 고향으로 온 남편은 만삭의 아내에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도 않은 채 무거운 가방을 들리고, 보다 못한 남편의 친구가 만삭의 몸으로 낑낑대던 그녀의 가방을 받는다. 그래도 순녀는 남편이 돌아와 설레고 반가웠다.

하지만 돌아온 건 남편만이 아니다. 악극단의 가수 출신인 채봉이라는 여자도 남편을 찾아오고 심지어 그녀가 남편과 한 방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결국 그런 시련 등으로 그토록 기다리며 열 달 동안 품고 있던 아이를 떠나보내고, 다시 남편도 서울로 떠나버린다.

사업을 한다며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 심지어 다른 여자랑 살림을 차렸고 거기서 아이까지 낳았다. 고향길로 가며 이 동네 땅이 다 자기네 거라며 자랑하던 그 정씨 일가의 땅은 그 사업의 핑계로 해방과 전쟁, 격동의 시대 속에 사라져 버린다. 시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더 이상 그곳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져 버린 순녀는 남편도, 자식도 없이 빈손으로 그곳을 떠난다.

조강지처라는 굴레 혹은 숙명

호구지책을 하자니, 시집살이 내내 끊임없이 끓여대던 곰탕밖에 없었다. 곰탕집 열 돈이라도 보태 달라 만난 남편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자식 과외 시킬 돈도 없다며 순녀의 입을 막는다. 어렵사리 겨우 천막을 쳐서 차린 곰탕집, 그녀가 견뎌온 시련의 세월을 배신한 남편과 달리 그 시간의 맛에 세상 사람들이 화답한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그녀의 곁에 남은 건 남편을 찾아 고향집에 온 풍각쟁이 채봉뿐이다. 그래도 여전히 인성의 아내라는 호적에 새겨진 글씨는 그녀에게 조강지처라는 자부심인지 굴레인지를 남기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그렇게 곰탕을 끓이며 살아온 세월 어느덧 곰탕집이 40주년이 되고, 늙고 병든 남편이 돌아온다. 며느리로 살아온 인생이 거둔 뒤늦은 결실인지 또 다른 짐인지.

민며느리로 들어와 남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로서의 삶을 견디고 버텨낸 순녀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 끓여야 제대로 된 맛이 나는 음식인 <곰탕>에 빗대어 그려낸 이 드라마는 류현경, 김혜수, 김용림 등 연배가 다른 세 배우를 통해 전통적 여성상을 그 시대의 상징적인 장치들을 통해 설명한다.

질곡의 가부장제, 그 희생자이자 헌신적 실천자들

쌀 삼백 섬에 팔린 '매혼'의 대상, 한 집안의 며느리라지만 일하는 식솔이나 대를 잇는 수단, 심지어 개명의 물이 든 남편마저 외면한 여자 아닌 여자. 하지만 순녀는 자신의 자리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바람이 나다 못해 살림을 차리고 그 살림 차린 여자에게서 아들을 얻은 남편임에도 오래도록 '조강지처'라는 허울, 아니 그녀를 유일하게 증명할 그 허명에 매달린다.

심지어 평생 아이를 생산하지 못한 그녀는, 시어머니가 겨우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 사실이 포한이 되듯이, 외려 아들을 낳아 대를 잇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다. 어디 그뿐인가. 다 늙고 병들어 돌아와 그제야 너무 미안하다는 남편에게 그녀는 뜻밖에도 미안하단다. 평생 미워해서, 때로는 남편보다 남편의 친구를 더 그리워해서.

드라마는 일제 강점기, 해방, 전쟁 등 격변기에 전통적 가족제도의 굴레 속에서도 곰탕처럼 뭉근하게 삶의 정취를 피어낸 순녀의 삶을 통해 전통적 여성상의 수난과 인간 승리를 그려내려 했겠지만, 2019년에 다시 본 순녀의 인생은 척박하기가 그지없다.

SBS 설 특집극 2부작 <곰탕>

그런데 도저히 수긍하기 힘들다하지만 불과 한 세대 전의 삶이다. 가부장제가 한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사회에서 나고 자라고 그 가족제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아야 했던 여성들의 삶에 무슨 다른 대안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자신을 놓치지 않고 곰탕처럼 견디고 뭉그러져 그 끝에서 도달한 경지는 그 누구도 쉽게 예단할 수 없는 한 시대의 표상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순녀의 삶에서 2019년은 얼마나 멀어졌을까? 호칭도 다 뜯어 고친다 하지만 주인공이 시댁의 전통에 따라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야기가 인기를 끌고 있는 세태로 보면, 외양을 달라졌을지언정 여전히 가부장제적 가족제도의 뿌리는 곰탕보다 더 뭉근하게 우리 삶의 근저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이번 설에도 여전히 전 부칠 걱정을 하는 수많은 며느리들의 사례에서처럼.

아이러니한 건 정작 가부장제의 실천자들이 뜻밖에도 그 희생의 당사자인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드라마 <곰탕>에서처럼 시집살이를 하던 순녀가 나이 들어 조강지처의 자리를 고집하고, 아들을 하나밖에 못 낳은 시어머니가 정작 순녀의 몸을 훑으며 아들 낳기를 종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늙고 병들어 돌아온 남편을 거두자 비로소 자신의 임무를 다한 듯 보이는 순녀의 일생. 체제의 희생자에서 어느덧 체제의 가장 강력한 추종자가 되어 그 체제의 재생산에 헌신적이 되어가는 여성들, 그것이 바로 드라마 속에서도 보이는 질곡의 고부 관계 혹은 가족관계의 딜레마다. 즉, 가부장제는 남자의 것이 아니라, 결국 한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의식과 행동을 결정짓는 사회적 체제였고, 지금도 상당 부분 그렇다.

하지만 그 질곡조차도 사실은 ‘역사적'이다.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던 가부장제가 사실은 모계적 전통이 강했던 조선에서 유교의 통치이념이 체제내화 되기 시작한 중기 이후에야 어렵사리 정착되었듯이, 헤어날 길 없는 명절의 악순환은 어쩌면 이 시대 젊은이들의 가족관계의 굴레보다는 차라리 비혼을 택하겠다는 당찬 선언으로 조만간 자체 해산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오래된 전설 같은 곰탕을 끓이는 순녀의 이야기는 절정이라 쓰고, 결말의 첫 장을 쓸지도 모를 2019년 설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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