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성장 등에 대한 보수세력의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정부 여당의 핵심 인사들은 “그렇다고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해왔다. 맞는 말이다. 이 정부의 경제 철학은 누군가의 표현처럼 “무덤에 있어야 할 386 운동권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권 철학’의 눈으로 보면 포용적 국가론이나 소득주도성장은 변형된 케인스주의와 유럽식 코포라티즘의 결합에 불과하다. 이 지면에서 수도 없이 지적했지만 이것 자체가 완벽한 대안은 아니다. 다만 이 정부가 내놓은 정책 비전 중 그나마 완결적이고 총론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평가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과연 이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방법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미 지적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 사업 선정 결과를 보면 그렇다. 애초 언론과 전문가들은 지자체가 신청한 약70조원에 이르는 사업 중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은 최소 40조에서 최대 60조원도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29일 발표를 보면 최종 대상으로 결정된 사업은 약 24조1천억 규모이다. 애초 예상보다는 규모가 줄었다고 볼 수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9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에서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대상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토건국가’로 돌아가자는 것이냐는 일각의 비판이 효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정도가 되진 않는다. 이미 이 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대상사업 규모가 이명박 정부에 이은 역대 2위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더 황당한 것은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GTX-B노선과 신분당선 연장 사업을 놓고 인천의 송도국제신도시와 경기 수원시에서 대놓고 반발하는 게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게 그렇다. 이 지역 국회의원들은 ‘수도권 역차별’이라는 용어까지 꺼내들고 있다.

지역간 형평성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도 거론된다. 경북권의 경우 자신들이 원하는 사업이 선정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판단’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비슷한 반응은 호남을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을 자임하는 민주평화당 쪽에서도 나왔다. 경남권에 비하면 전북권의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사업 규모가 지나치게 적은데 측근인 김경수 경남도지사를 배려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정부 여당이 과연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지역별 갈등이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과거의 사례를 통해 충분히 알면서도 강행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 등의 여파가 강력히 미친 지역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과 워낙 악화된 고용지표를 단기간에 뒤집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공격적인 SOC투자는 예정된 일이었지만 각 지자체가 신청한 사업을 선정하는 방식만으로는 이런 논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총선 등의 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 아니냐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앞서 언급한대로 ‘토건국가’로 비판의 대상이 됐던 과거 정부의 해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정부 여당의 핵심 인사들이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확신에 찬 발언을 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상황은 어떤 악의가 실린 것이라기보다는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지 않느냐는 체념에 가까운 것으로 비춰진다.

그런 의심을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단서가 김현철 전 경제보좌관의 사표 수리이다. 김현철 전 보좌관은 28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신남방정책 관련 강연을 하면서 청년과 5, 60대에게 아세안지역 국가들에서 기회를 찾으라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그냥 그렇다고 하면 납득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과정에서 동원한 수사는 아주 고약했다. “박항서 감독도 구조조정 됐는데 (베트남에서) 인생 이모작 터뜨린 것 아니냐. 5, 60대들은 할 일 없다고 산에나 가고 SNS에서 험악한 덧글 달지 말고 아세안으로 가라”, “국문과 졸업하면 취직을 못하는데 그런 학생들을 많이 뽑아서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 한글 선생님으로 보내고 싶을 정도이다”는 등의 말이 인터넷 상에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김현철 경제보좌관의 사의를 수용했다는 발표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중동으로 가라고 한 박근혜 정권과 뭐가 다르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보다는 경제보좌관이 구조조정과 실업에 대해 갖는 인식이 드러났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말실수는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말도 있는데, 웃자고 한 말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사안을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을 고통스럽게 하는 직접적 요인인 구조조정과 취업난에 대한 대책을 먹고 살만한 사람이나 떠올릴 수준 이상으로 고민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얘기다. 이런 인식 속에서 결국 실업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주제는 파국을 맞은 사회적 대화 틀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27일 민주노총은 경사노위 참가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불참, 조건부 참여, 참여 후 상황에 따른 탈퇴 등 3가지 수정안이 전부 부결됐고 참여를 전제한 원안은 표결에 이르지도 못했다. 원안이 부결될 경우 집행부가 져야 할 부담을 고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민주노총은 곧 임시대의원대회를 다시 열어 2019년 사업계획을 제출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여기에 경사노위 참가 여부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확인된 것은 탄력근로제 단위시간 확대와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 ILO협약 비준 등이 핵심고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무언가 절충을 시도하는 안에서 반복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보면 그렇다. 집권 여당은 2월 임시국회에서 이 주제들과 관련해 민주노총 등 노동계가 반대하거나 만족하지 않는 수준의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민주노총 입장에서 2월은 투쟁국면이 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러면 이 정권 내에 민주노총까지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의 동력을 다시 살리기는 어려워진다. 애초 정부가 내놨던 ‘총체적 비전’이 무력화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지난해 최저임금 산입구조 개편 당시에 충분히 예상된 바였다. 이때 이미 민주노총 등은 사회적 대화에 참여해봐야 ‘양보’를 강요당하는 수준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장도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는 서로 양보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의 취지를 해온 바 있다.

사회적 대화 틀 안에서 노동계의 양보가 불가피하다면 그 이전에 정부가 다양한 수단을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의 문제를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시정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선제적으로 개혁의 ‘속도조절’을 수용했다. 왜 그랬을까? 이미 그 당시에 어차피 사회적 대화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 아닌가? 물론 누구도 해법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세계 각국의 정치가 직면한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나 “실제로 뭔가 해보려 노력했지만 안 됐다”는 것과 “어차피 처음부터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했다”는 건 다른 정치적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지금 후자로 완전히 기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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