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영장실질심사가 열린다. 나름 긴 시간 논란을 끌어왔던 ‘사법농단’의 한 고비를 또 넘기는 날인 셈이다. 영장이 발부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양승태 전 대법원장 영장 발부 여부만 갖고 이 나라 사법부의 모든 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근 불거진 논란들을 보면 과연 삼권분립이란 무엇인지에 다시 한 번 의문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영장이 기각될 것이라고들 보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로 전직 대법원장이므로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미 수사가 상당 부분 진행되었기 때문에 검찰이 충분한 증거 수집을 했기 때문에 증거 인멸의 우려도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던 고영한, 박병대 전 대법관 혐의 관련 영장이 기각된 상태에서 그 윗선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 영장을 발부하는 것은 형식논리상 맞지 않다는 것이다(검찰은 박병대 전 대법관에 대한 영장을 재청구한 상태다).

하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될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혐의를 전면 부인하는 가운데 검찰 조사에 출석하면서 대법원 앞에서 입장 표명을 한 것 등을 간접적인 증거인멸 시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이 대법원장을 지낸 시절 요직을 맡았던 판사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발부될 수도 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만에 하나 발부된다면 이런 논리가 그나마 가능하다”는 것에 가깝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검찰 조서를 30시간 이상 열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의도를 놓고도 여러 추측이 나온 바 있다. 조사 과정에서의 질의 내용을 아예 통째로 외워 검찰이 확보한 카드를 재구성해보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설득력 있게 제기됐다. 때문에 영장실질심사는 그야말로 치열한 법리다툼 속에서 진행될 걸로 보인다. 그 결과 재판부가 범죄 혐의 소명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낼 수도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사법농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의 기류이다.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칼럼이 대표적이다. 이 칼럼은 미국 연방대법원 등의 사례를 ‘사법농단’ 의혹과 비교하며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등을 ‘있을 수도 있는 일’로 묘사하고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일본 기업 측 법률대리인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을 직접 만나 재판 정보를 넘기는 등의 수단을 통해 개입한 강제징용 소송은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것이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게 법원 판단의 핵심이다. 한일청구권협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도 수차례 재확인한 바 있다.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도 인정한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지난해 중의원에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본다는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외의 부분은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일본 정부 및 사법부의 해석일 뿐이다. 그렇다면 법원 판단을 존중하는 대전제 안에서 한국과 일본 정부가 대안을 모색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다.

KBS 보도에 의하면 이 문제가 양국간 재판거래의 형식으로 풀리게 된 것은 2015년 3월 이른바 ‘한일현인회의’ 이후이다. 양국의 정치권 인사 등 관계자들은 이 자리에서 강제징용 재판과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논의를 했다고 한다. 이후 6월 서울에서 다시 열린 모임에서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직접 강제징용 재판 문제를 언급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외교부에 나라 망신, 국격 손상이라며 의견서 제출을 종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김앤장 소속 인사가 중재에 나서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만일 이 시기에 우리에게는 삼권분립이 중요하고 정부가 사법부 판결에 개입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면서 일본의 요구를 정리해버렸다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지 의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이런 균형감각을 발휘하는 해법을 쉽게 포기한 것은 과거 박정희 정부와 공사 양면에서 단절하지 못했다는 점과 개인의 권리를 국가 간 거래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정치관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23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 관계자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구속 촉구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사법부의 독립이 엄정하게 지켜지는 체계와 삼권분립의 원칙이 기득권의 이해에 따라 달라지는 체계 중 어느 쪽이 한국의 ‘표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사법농단’과 관련한 논란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만일 ‘사법농단’이 말 그대로 ‘있을 수 있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면 한국의 ‘표준’은 후자일 것이다. 그야말로 ‘헬조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하게도 검찰이 추가 기소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혐의와 이에 대한 정치권의 태도는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검찰의 추가 기소 내용은 서영교 전병헌 이군현 노철래 의원 및 전 의원들이 각자 재판민원을 제기했고 이 내용이 법원장을 통해 담당 재판부에까지 전달됐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특히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사례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검찰에 따르면 서영교 의원은 자기 지역구 지인 아들의 강제추행미수 혐의를 공연음란으로 바꿔달라는 취지의 청탁을 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들은 주로 동정론이나 임종헌 음모론 등을 말하고 있다. 서영교 의원이 원내수석부대표직을 맡으며 나름대로 고생을 했다거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현직 의원 중에서 서영교 의원 이름만 말한 의도가 있지 않겠느냐는 식이다.

손혜원 의원의 목포 투기 의혹에 대해 열을 올리는 자유한국당도 이 대목에서는 ‘헐리우드 액션’만 반복하고 있다. 이군현, 노철래 전 의원에 더해 앞서 의혹이 불거진 홍일표 의원까지 자당 소속 국회의원들도 청탁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이군현, 노철래 전 의원은 야당 소속 법사위원을 통해 청탁을 한 것으로 돼있는데 이게 누구인지 밝혀지면 추가적인 파장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의 발언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나 한다. 유인태 사무총장은 22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지역구 민원을 국회 파견 판사에게 전달하는 일이 많다며 “옛날 같으면 국회의원이 그런 지역 민원 하나 했다고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상고법원 문제가 걸리니 양승태 사법부가 더 무리했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입법부를 통한 재판 민원이 어떤 형태로든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법부 판결에 대한 어떤 정당한 억울함을 호소하는 창구가 될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으로는 각자의 사익추구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이 촛불시위에도 나서고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고 한 것은 이런 문제를 바로잡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피플파워’를 자처하는 지금 정부도 실제 문제 해결에 성공하거나 탁월한 대안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거기까지라면 한 숟가락에 배부를 수 없다는 심정으로 어느 정도 이해도 하겠지만 최근 여당의 태도를 보면 어떤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영장이 기각되면 여론은 또 요동칠 것이다. 그때 그저 비분강개하며 사법부를 비판하는 ‘액션’으로 ‘개혁세력’이 나름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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