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상해로 가서 당시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생활사를 직접 체험해보는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 1부 ‘독립자금을 벌어라’ 편에서는 출연자 김수로, 박찬호, 강한나, 김동완, 공찬 등이 직접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뛰어든 생활전선을 체험해 보았다. 그에 이어 1월 14일 방영된 2부는 ‘임시정부를 구하라’이다. 왜 임시정부를 구하라였을까? 그 내막과 결국 자신을 던져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구한 윤봉길, 이봉창 두 의사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위기에 빠진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집 MBC 스페셜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 편

1919년 국제적 금융도시 상해에 첫 임시정부 청사가 세워졌다. 3.1 운동의 열기가 남아있던 시절, 전남 함평의 지주 아들 김철이 자신의 가산을 정리해왔고, 해외에 세워진 첫 임시정부이기에 각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이 답지해왔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1930년대 임시정부는 이제 집세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이 한반도 내 식민지 체제를 갖춰가는 것과 함께 만주로 중국으로 팽창 정책의 야욕을 한껏 펼치던 시기였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잃은 농민들은 대다수 만주 등지로 이주했다. 지린성 창춘의 만보산(완바오 산)에 일본이 개간을 계약한 땅을 조치하기로 한 우리 농민들, 수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곳의 중국인들과 충돌을 빚게 된다. 실제 사건은 크지 않았지만 이 사건을 일본의 사주를 받은 <경성일보>가 부풀려 보도하는 하는 바람에 전국에 반중국인 정서가 한껏 들쑤셔졌고, 중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며 다수의 중국인 사상자가 생겨났다. 결국 <동아일보>가 사건을 바로잡으면서 국내의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이는 다시 중국내 반한 감정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집 MBC 스페셜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 편

이렇게 '만보산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중국내 반한 감정, 중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조선인 박해는 상해 임정에 직접적인 타격이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등으로 중국내 일본의 영향력이 커져가면서 청사의 운영자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렇게 임시정부의 운영, 나아가 독립 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구 선생을 비롯한 상해 임시정부가 생각한 타개책은 이런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일본에 대한 강력한 한 방의 타격이었다. 이를 위해 1931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 선생을 비롯한 80여 명의 비밀 요원들이 모여 <한인애국단>을 결성한다.

<한인애국단>은 첫 의거로 난징을 방문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우치다 총재 암살을 준비하였지만 방문이 취소되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한다. 그에 따라 첫 의거는 이봉창 의사에게 맡겨졌다. 1932년 1월 8일 신년 연병식을 위해 가던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비록 일왕 암살에는 실패하였지만 이 사건은 중국 내 팽배해있던 반한 감정을 잠재웠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의 활로를 열어주었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로 그동안 중단되었던 독립자금이 하와이 등 전 세계에서 답지하기 시작했고, 중국의 호의적인 협조로 무기를 구하기가 한결 용의해졌다. 이런 이봉창 열사의 의거로 인한 분위기의 반전이 있었기에, 그로부터 1년 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가능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행적을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집 MBC 스페셜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 편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에서 출연진은 <한인애국단> 숙소를 '길을 잃을 것 같으면 ㄹ자를 길에 뿌려 찾아오도록 했다’는 이화림 선생의 회고록에 따라 찾아본다. 또한 <인민영웅기념탑> 이 세워진 황포탄 부두를 찾아가 '나는 적성(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였나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일본으로 떠난 이봉창 의사의 행적을 짚어본다. 이곳은 또한 11개월 후 이봉창 의사가 독립에의 결심을 가지고 떠난 것과 달리, 항저우 공원에서 의거 후 체포되어 윤봉길 의사가 압송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는 노란손수건을 찾아 의거 전 윤봉길 의사의 행적을 따른다. 1930년 청도를 거쳐 상해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을 처음 만난 '사대 다관', 4월 27일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안공근 선생의 집터, 이력서와 유서를 남겼던 <중국기독청년회관(YMCA)>, 의거 당일 아침 '농부가 논밭에 나가듯 태연자약했던'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과 아침식사를 하고 가지고 있던 돈을 주었던 <김해산의 집> 등을 둘러본다. 또한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상해 <매헌 기념관에 들러> 죽음에 이르러서도 강직했던 윤봉길 의사가 '강보에 싸인 두 병정, 너희가 피가 있고 뼈가 있거든 조선을 위한 용감한 투사가 되라'며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을 다시금 아로새겨 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집 MBC 스페셜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 편

막연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남겨졌던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하지만 출연진이 직접 그곳을 찾아보고, 윤봉길 의사가 담담하게 걸어가셨다던 항저우 공원으로 향한 길을 걸어보는 여정은 그 자체로 한 세기의 간극을 넘어 출연진을 울컥하게 만든다. 거기에 자신이 가졌던 6원의 시계가 더는 필요 없으니 2원짜리 김구 선생의 시계와 바꾸셨다던 에피소드. 지금까지 우리가 도시락 폭탄이라 알았지만 사실은 그날 던져진 건 물병 폭탄이었으며 도시락 폭탄은 윤봉길 의사의 자폭용이었다는 예외적 진실. 그리고 무사히 폭탄을 옮기기 위해 바짓가랑이 사이에 숨기고 일본으로 떠났던 이봉창 의사의 행적 등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잘못 알았던 사실을 퀴즈를 통해 새롭게 알아간다.

또한 두 의사뿐이 아니다. <독립원정대의 하루, 살이 -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는 육삼정을 찾아 같은 날 윤봉길 의사와 같이 의거를 준비했던 또 다른 열사의 행적도 소개한다. 일찍이 3.1 운동부터 독립운동에 매진해온 백정기 열사는, 같은 시기 김구 선생과 같은 취지로 상해 흑색 테러단을 조직하고 홍커우 공원에 들어가려 했지만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1933년 일본 공사 암살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어 옥사하셨던, 우리가 몰랐던 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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