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것은 어느 기자의 성의 없는 질문에 대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는 각본없는 기자회견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종의 해프닝 정도에 불과한 일이다. 기자회견을 통해 드러난 대통령의 정책적 인식을 따지고 맥락을 짚어보는 게 지금은 더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종합적으로 경제적 성과를 내겠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존의 정책기조를 유지하겠다면서도 ‘성장’과 ‘혁신’ 등의 단어를 수십 회 언급하며 이런 메시지를 거듭 강조했다. 경제 분야에서 정책적 성과가 부진한 것을 반성하는 발언도 있었다.

이렇게 대통령이 현실을 인정하면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결의를 다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어려운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무엇을 제시할 수 있느냐에 있다. 일부 언론들은 혁신성장과 관련한 비전 제시가 구체적이지 못해 아쉽다고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오히려 분명해진 대목도 있다.

얼마 전 보수언론은 김수현 정책실장 임명을 두고 극단주의자가 정책의 키를 쥐게 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는데, 실제 이후 청와대가 무게를 실은 것은 재계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말 김수현 정책실장과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이 주요 대기업 부회장급 인사들과 조찬회동을 한 게 대표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영민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내린 첫 지시도 재계 인사를 만나라는 것이었다.

재계가 무엇을 요구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을 무력화할 수 있는 각종 조치들과 기업-노동자 관계에서 기업에 더 유리한 일을 해달라는 게 핵심이다. 이 중에는 가업을 승계할 경우 상속세나 증여세를 줄여달라는 내용도 있다. 당장은 중소기업 문제를 근거로 들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재벌에게도 득이 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물론 당장 고용 관련 지표가 개선되지 않는 현실에서 대기업에 기대 단기적인 효과를 보려는 시도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찾아 이재용 부회장을 만난 일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비공개 간담회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 계획 등을 설명하면서 국내 대표기업으로서 의무를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대기업의 일자리 창출이 ‘의무’라는 이유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확인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언급된 광주형 일자리 같은 사례를 봐도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은 논의에 진척이 없는 광주형 일자리 문제에 대해 “현대자동차가 한국에 새로운 생산라인을 만든 게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이다”라고 했다.

현대자동차는 1996년 이후 국내에 새로 공장을 만들지 않고 있다. 앞서 이재용 부회장의 말을 빌자면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광주형 일자리 문제에 있어서 현대차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수용하는 것에 더해 파업을 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초 협약 조인식이 무산된 이유도 임단협 유예조항 문제였다. 대기업이 ‘의무’를 다하기 위한 ‘특혜’를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 분야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대기업과 소통을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정책적 의존을 하게 되는 것 자체를 ‘악’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문제는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대기업을 압박하고 사회적으로 통제할 수단을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시기를 놓쳐버린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더 우려가 되는 것은 대기업에 일정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이해관계의 조정이 더 어려워지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규제완화 문제를 놓고 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카풀 도입 문제를 언급하며 “4차산업혁명 속에서 경제 사회 현실이 크게 바뀌고 있는데도 옛날의 가치가 그대로 고집되는 경우가 왕왕 있어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혁신성장이라는 틀로 성과를 내기에 가장 적합한 분야로 택시업계 문제를 꼽는다. 기존의 산업이 낙후된 상태이고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게 사실인데, 발달한 기술을 활용해 서비스를 개선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수단이 이미 만들어져 있으며 해외 사례를 통해 일부 검증도 됐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국내 택시산업을 둘러싼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기 어렵다는 게 문제이다. 정부와 택시업계, 택시회사와 택시노동자, 법인택시와 개인택시 간의 이해관계가 전부 다르고 일부에선 충돌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정부 여당이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유가 이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대타협’이 이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예를 들어 정부가 제안하는 완전월급제 시행 및 사납금제 폐지는 법인택시 기사들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문제지만 택시회사 사주들은 되도록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 해법이다. 회사가 취약한 상태에서 택시노동자들에 대한 통제 수단을 잃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이 방안은 개인택시 기사 입장에선 큰 의미가 없다. 개인택시 기사들을 향한 대책은 감차보상금 현실화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국민의 세금이 추가 투입돼야 한다는 점에서 논란이 클 수밖에 없다.

‘국민 세금 추가 투입론’의 약점은 택시가 법적으로 대중교통수단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정해진 노선 운행 등의 공공성이 담보돼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요금이 책정돼있는 상태에서 택시가 대중교통체계의 일익을 담당해온 것은 또 사실이다. 여기에 택시가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생계수단이 돼왔다는 점, 공급과잉인 상태에서 회사가 부담을 사납금제 등을 통해 기사들에게 전가해왔다는 점을 함께 보면 이게 단순히 4차산업혁명을 둘러싼 문제일 수만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택시노동자 2명의 분신은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이게 보여주는 건 뭘까? 경제적 성과를 내기 위한 여러 시도의 과정에서 누군가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데, 이때 가장 어려운 지경에 처하는 것은 결국 충격을 흡수할 수단이 넓은 대기업이 아니라 노동자이거나 취약계층이라는 것이다. 이 정부 초기에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간의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 의존적 행보로 이런 믿음은 더 엷어지는 중이다.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단지 ‘경제’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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