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6일, SBS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신년 특집 다큐멘터리 <의렬단의 독립전쟁>을 방영했다. 이 다큐가 주목할 만한 이유는 바로 그 주인공이 의열단이기 때문이다. 당시 가장 비타협적이고 강고하게 일제에 저항했던 단체, 하지만 우리는 이 단체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단체와 그 단장인 김원봉이 우리 독립 운동사의 접혀진 부분인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에게 김원봉은 '나 밀양 사람이오' 하던 대사와 함께 등장한 <암살>의 조승우가 분한 역할로, 그리고 또 다른 영화 <밀정>에서 이병헌이 분한 정채산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다가왔다. 그 영화 속 신출귀몰 바람 같던 독립운동의 전설 김원봉, 그리고 그가 단장으로 있던 의열단을 SBS가 복원한다.

다큐를 연 건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오지 태항산맥 그곳 운두저촌에 남겨진 한글 문구이다.

“왜놈의 상관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 오시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SBS 신년특집 다큐멘터리 <의렬단의 독립전쟁> 편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조선말을 운두저촌 주민들은 칠을 더하며 지켜왔다. 왜 이곳 주민들은 조선의용군의 저 문구를 지켜주려 했을까? 심지어 나이든 주민들 중에는 조선 의용군의 우리말 군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도대체 이역만리 이 외진 곳에서 조선 청년들은 무엇을 했던가? 그 의문으로부터 다큐는 시작된다.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다큐는 1923년 경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월 종로 경찰서에 폭탄이 던져졌다. 일제, 그중에서도 그 폭압적 권력의 핵심부인 종로 경찰서를 공격하다니.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미와 경부는 사건의 용의자로 김상옥을 추정하고 그의 주변 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왜 김상옥이었을까? 그는 철물점을 하는 상인이었지만, 사실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거기에 명사수에 비호장군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신출귀몰하다는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1920년 미 의원단이 경성을 방문하고 사이토 총독이 이들을 영접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상옥은 이곳에 폭탄을 던지고자 했다. 하지만 그만 하루 전 예비 검속에 폭탄 등을 가진 채 걸려 버린다. 비호장군답게 검거를 피해 잠적했던 김상옥, 그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에 당연히 종로 경찰서 사건의 주범으로 추정된 것이다.

그리고 1월 22일 그가 효자동 민가에 숨어있다는 소식을 접한 일경은 김상옥 한 사람을 잡기 위해 무려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집중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겨우 총 두 자루, 하지만 명사수였던 그는 3시간 동안 일경과 대치했고 총알이 떨어진 걸 확인하고 동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결을 택한다. 이는 김장옥이란 이름으로 일경과 대치하다 죽음을 맞이한 김장옥의 영화 <밀정> 속 첫 씬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김상옥의 죽음 이후 무려 두 달 동안이나 보도 통제를 하며 수사를 하던 일경은 이 사건에서 김원봉이란 인물을 찾아낸다. 바로 김원봉이 단장으로 있던 의열단의 의거였던 것이다.

김원봉과 의열단

SBS 신년특집 다큐멘터리 <의렬단의 독립전쟁> 편

1919년 11월 상해, 조선의 청년들은 비폭력 투쟁이었던 3.1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광복을 이루기 위해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고자 무력을 수단으로 암살을 정의로 삼아 5개의 적 기관(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등) 파괴와 7악(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 수뇌부,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의 제거를 목표로 하여 결성되었다.

그에 따라 앞서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을 비롯하여
1920년 부산 경찰서장 폭사 사건,
같은 해 밀양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1921년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내 폭탄 폭파 사건,
1922년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의 일본 육군 대장 암살 시도,
1924년 김지섭 일본 천황궁 앞 폭탄 투척 시도
1924년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의 친일파 정갑주 일가족 사살, 밀정 배정자 암살 시도, 일진회 이용구 회장 부상,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 투척,
1926년 나석주의 동양 척식 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 습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미처 알지 못했던 일제시대 국내 혹은 국외 무장 투쟁들을 벌여왔다.

혁혁한 활동을 벌였지만 동시에 김상옥, 나석주의 자결, 김병현의 순국, 김광추, 박희광, 김지섭 등의 체포 등을 겪으며 개인적 테러활동에 한계에 도달하고, 독립운동 내에 불기 시작한 사회주의 물결과 함께 의열단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종적을 감춘 김원봉,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6년 중국 남경의 천녕사에서였다.

조선의용대와 의용군

SBS 신년특집 다큐멘터리 <의렬단의 독립전쟁> 편

개인적인 투쟁을 본격적인 무장 투쟁으로 승화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1932년 조선혁명정치 간부학교가 개교되었다. 또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위해 김원봉은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중국 혁명 엘리트의 산실인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38년 중일 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조선의용대가 창설, 이들은 조선민족해방과 국제적 동맹으로서 중국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두 가지 임무를 내걸고 중일 전쟁에서 선전전, 심리전 등을 비롯한 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거기에 좀 더 동포들이 많은 지역으로의 투쟁 거점을 옮기고자 하는 열망에 조선의용대 상당수가 화북으로 옮긴다. 1042년 조선의용군으로 호가장 전투 등에서 앞서 운두저촌의 중국인들이 기릴 정도로 혁혁한 활약을 보였고 이들의 활약 덕분에 팽덕회, 주석, 등소평 등 중국 혁명의 주역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한편 남경에 남아있던 김원봉 등은 1942년 중국 임시 정부에 합류 한국광복군 제 1지대가 되어 조선 진격의 준비를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한다.

의의와 한계

SBS 신년특집 다큐멘터리 <의렬단의 독립전쟁> 편

다큐는 1919년에 결성한 의열단의 궤적을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다룬다. 무엇보다 우리 독립 운동사의 존재하지만 말할 수 없었던 영역을 봉인해제하고자 했던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굳이 조승우나 이병헌이 아니었더라도 영화 <암살>이나 <밀정>에서 등장한 김원봉, 혹은 김원봉으로 추정된 인물의 존재감은 컸다. 하지만, 그 큰 존재감을 가진 인물을 우리는 드러내어 말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여전히 아쉽다. 다큐는 의열단의 존재적 계승을 1935년 해체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으로 이어 서술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딜레마가 되고 있는 '사회주의 노선'에 대해 다큐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함구하고 있다.

과연 의열단과 아나키즘 그리고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과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노선을 분리하여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다큐는 자충수를 두고 만다. 다큐에서는 마치 김원봉이 그의 친구 윤세주에게 부탁하여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화북으로 옮긴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엄밀하게 조선의용군 내의 분파적 결정이었다. 즉 국민당 정부와의 협조적 관계를 선택했던 김원봉과, 물론 우리 주민이 많은 만주로의 이주도 있지만 중국 공산당 내 팔로군으로 귀속한 조선의용군의 행보는 엄연히 다른 길인 것이다. 이들은 김원봉과 이른바 '연안파'로 나뉘어졌으며 광복군과 북한의 조선의용군의 모태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들은 모두 자진 월북 이후 숙청이라는 사건을 겪기도 하였다.

과연 역사를 어디까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객관적 사상적 궤적에 대한 사실을 드러낼 자신이 없었다면 차라리, 1920년대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폭력 투쟁의 의열단만을 충실히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실하게 했다면 다큐의 한 시간을 채우고도 넘쳤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SBS <의렬단의 독립투쟁>은 의의와 한계를 가진, 어쩌면 일제하 독립 운동사에 대한 방송의 과제를 남긴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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