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 앞 바다에서 기름유출 사고로 피해를 입은 한 60대 어민이 자살한 사건이 있다. 지난 10일 오전 8시10분께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2리 이영권씨가 자신의 집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을 아들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숨졌다. 이씨는 기름유출 사고로 인한 절망과 ‘생활고’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다. 이씨의 죽음은 기름유출 사고로 피해를 입은 현지 주민들의 ‘상황’이 어떤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 한겨레 1월15일자 12면.
하지만 이씨의 죽음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다수 언론들이 이 사안 자체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날(10일) 피해지역 어민들이 삼성중공업을 항의 방문하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피해를 입은 태안 주민들의 요구사안을 전달했지만 이 사안 역시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철저한 외면이었다.

대다수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치러진 고 이영권씨 장례식

고 이영권씨의 장례식이 14일 오전 태안군청에서 군민 등 1만여명이 애도하는 가운데 군민장으로 치러졌다. 1만여명의 참석자가 이씨의 죽음을 애도했지만 이 사안 역시 언론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오늘자(15일) 아침신문들 가운데 고 이영권씨의 장례식을 보도한 곳은 한겨레 외에는 거의 없었다.

사실 지난 10일 발생한 이씨의 죽음과 태안어민들의 삼성중공업 항의방문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해당 지역 주민들의 정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이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14일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태안에서 긍정적 변화의 힘을 느낀다”고 강조했지만, 이는 현지 주민들이 느끼고 있는 정서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발언이다.

오늘자(15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이날 장례식에서 이씨의 딸은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한다. “기름을 뿌린 사람도 멀쩡히 숨을 쉬고 살아가는데 아버지가 왜 삶을 포기하신 것인지 원망스럽다.” 이원재 군민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 또한 영결사에서 “사고를 낸 당사자는 침묵하고 어느 누구도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 서울신문 1월15일자 2면.
이씨 영정 옆에는 기름으로 뒤덮인 해변가 기름에 젖은 새들, 주민들의 방제사진들이 내걸렸고, 주민들은 방제복 차림으로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또 ‘기름피해 진짜 주범 삼성그룹 무한책임’ ‘검은 바다 검은 사람 앞에 정부는 각성하라’ 등 사고를 낸 삼성중공업의 책임을 추궁하고 피해 보상에 정부가 나서기를 촉구하는 만장 수백여개가 내걸렸다.

긍정적 변화의 힘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 앞에 고통받는 현지 주민들의 삶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태안에서 긍정적 변화의 힘 느낀다는 이명박 당선인, 현실 직시하라

사실 가장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곳은 언론이다. 대다수 언론은 기름유출 사고가 발생한 이후 피해규모나 사태의 심각성에만 주목했을 뿐 이번 사고의 원인과 책임규명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지 주민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쪽은 거의 보도를 하지 않은 채, 전국적으로 자원봉사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는 식의 보도만 양산했다. 자원봉사의 물결로 태안이 다시 살아난다거나 ‘역시 한국!’이라는 식의 보도가 대부분이었다.

자원봉사의 물결이 넘치고 다시 살아난다던 태안 현지 주민들은 지금 어떤가. 고 이영권씨의 죽음에서 보듯 기름유출 사고로 인한 절망과 ‘생활고’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 고통 받고 있다. 하지만 이 고통은 대다수 언론의 ‘태안 찬사’에 가려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다.

언론에 의한 ‘태안 찬사’를 걷어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는 태안의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현지 주민들의 ‘삶과 생존’의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 더 이상의 ‘태안 미화’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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