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게는 <바베트의 만찬, 빅 나이트, 음식남녀>부터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식객>까지, 요리나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보통 드라마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아, 주성치가 특유의 장기를 살려 <식신>이라는 코미디 영화를 만들기도 했었군요. 어쨌든 이런 영화들은 주로 음식을 매개체로 하여 관계를 회복한다거나 그 속에 삶과 사랑에 대한 철학을 녹여내고 있었죠. 그런데 이 영화 <된장>은 과감하게 미스터리라는 새로운 장르적인 접근을 시도하고자 나섰다고 합니다. 게다가 된장이라는 한국의 토속적인 음식(재료)을 소재로 차용했으니, 영화 속의 유진처럼 저 역시도 귀가 솔깃했습니다. 과연 된장을 가지고 어떻게 미스터리 장르를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이 급증했었죠.
물론 장진 사단을 거친 이서군 감독님의 작품이라는 것도 기대를 부추겼습니다. 분명 최근에는 장진 감독님께서 직접 연출한 영화와 영향력이 미친 영화에 공히 실망했지만, 우리나라 영화계에 끼친 기발함과 재치로 따지자면 역시 그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된장>은 미스터리와 된장의 언밸런스한 만남부터가 참 장진스러운 향취를 풍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필시 발군의 센스가 돋보이는 독특한 영화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심야의 FM>의 리뷰를 쓰며 그렇게 말했었죠. 시작하고 짧게는 10분, 길게는 15분만 흐르면 이 영화가 돈값을 제대로 해줄 것인지, 돈과 시간을 모두 날릴 것인지 대충 감이 잡힌다고... 여기까지 봤을 때의 <된장>은 분명 후자에 속했기에 모처럼 장진의 유전자로부터 태어난 영화가 제 맘에 들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대로만 이어간다면 미스터리 장르와 된장의 만남을 기발하고 재치 있게 그려줄 것이 틀림없어 보였죠. 그, 러, 나... <된장>은 결국 그 감이라는 게 100% 적중할 수는 없다는 걸 증명해주는 영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로 <된장>은 미스터리 영화였습니다. 포스터를 봐도 '장진 사단의 미스터리'라고 쓰여 있고, 네이버 영화게시판에 가도 <된장>의 장르는 '미스터리'라고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저 서정적인 포스터는 '미스터리'라는 문구가 더해지면서 장진식으로 미스터리를 그릴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관람하기 전에는 최소한의 정보만 접하는 제게 이것이 함정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제가 이 영화를 보고자 결심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도대체 된장과 미스터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였습니다. 초반부 몇 분은 이 궁금증의 수치를 한껏 끌어올리는 기폭제의 역할마저 해주면서 제 신경은 온통 "미스터리+된장=?"라는 기이한 공식에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된장>은 절대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된장>이 취하고 있는 미스터리 영화로서의 요건은 단순히 구조뿐입니다. 앞서 언급한 하나의 의문점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진행이 되긴 하지만, 그 과정에 필요한 요소가 갖춰 있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미스터리의 기본은 주인공이 난관을 거치며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가고 마침내 의문을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모든 단계를 그저 손쉽게 헤치며 앞으로 쑥쑥 잘도 나아갑니다. 이를 위해 한 형사가 유진의 친구로 등장하는데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그 비중은 미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탓에 관객으로서는 어떠한 몰입이나 집중을 쉬이 유지할 수가 없게 만듭니다. (솔직히 말해 형사 캐릭터는 구색 갖추기의 일환일 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정이 이쯤 되면 참신한 발상에서 시작한 <된장>은 그냥 장진식 영화가 빠지기 쉬운 오류를 재차 범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건 탈(脫)장르라고 보기도 힘든데, 그런 면에서 일찍이 장진 감독님께서 직접 선보이신 <박수칠 때 떠나라>와 대조를 이룹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 역시 전형적인 미스터리의 산물은 아니었고 뛰어난 완성도를 가졌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최소한 기본에 충실하(려 애쓰)고 거기에 변주가 더해진 영화였습니다. 반면 <된장>은 아무리 봐도 굳이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탈을 전면에까지 내세운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간혹 잘못된 홍보가 영화를 망치는 경우를 보는 것처럼 <된장>도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듯합니다. 혹은 자기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거나...
물론 단순히 미스터리일 것이라는 제 예상을 벗어났다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예상을 했다 하더라도 만약 이 두 가지가 잘만 엮어졌다면 "어? 미스터리인 줄 알았는데 멜로였네"라며 반색을 하는 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된장>을 보면서는 "뭐야? 미스터리가 아니었잖아"라는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반부에 보이는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가 전반부와 전혀 궤를 같이 하지 못하면서 따로 놀다 보니 실망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바에는 <식객>처럼 음식에 담긴 사연을 자연스레 풀어가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끝내 참신한 발상에서 비롯된 줄 알았던 시도가 그에 걸맞은 내실을 기하지 못하면서 과욕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으로 포장하려고 후반부에 들인 공을 전반부에 좀 더 쏟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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