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재신더 아던(1980년생) 뉴질랜드 총리는 2008년 총선 당시 지역구 도전 없이 정당명부 비례대표로 첫 등원했다. 3년 임기를 잘 마친 후 2011년과 2014년 지역구에서 연거푸 낙선했으나 이중 등록한 비례대표 명부로 3선에 성공했다. 2017년 2월 데이비드 시어러 전 노동당 대표가 유엔기구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임하자 그의 마운트 알버트 지역구(오클랜드 서부지역)를 물려받아 보궐선거에 출마, 지역구의원으로 변신했고 7개월 후 같은 지역구로 4선에 성공했다.

2018년 12월 초 문재인 대통령이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한인 최초 뉴질랜드 국회의원이자 한인여성 최초 외국 국회의원인 멜리사 리(1966년생, 한국명 이지연)가 문 대통령을 맞았다. 제1야당 국민당 소속으로 4선인 멜리사는 마운트 알버트 지역구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의원(List MP based in Mt. Albert)이다. 이 선거구는 헬렌 클라크 전 총리가 오랫동안 아성을 쌓은 노동당 초강세지역이다.

1988년 뉴질랜드로 이민 온 멜리사는 2008년 총선에서 정당명부비례대표로 첫 등원했다. 2011년 재선 도전 때는 노동당 소속 유엔활동가 출신 데이비드 시어러와 맞붙었으나 1 대 2.2의 득표수 차이로 대배하고 다시 정당명부로 구제된다. 2014년에는 당 대표를 역임해 체급을 올린 시어러와 리턴매치를 벌여 1 대 2 차이로 격차를 줄이며 선전하고 세 번째 비례의원이 되었다. 2017년 총선 때는 현직 총리이자 당시 노동당 대표를 맡은 재신더 아던과 맞섰으나 역시 1 대 2.7의 큰 표 차로 낙선하고 정당명부로 4선에 성공했다.

이처럼 뉴질랜드는 이중등록제를 허용하는 정통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이다. 다만 인구가 작기 때문에 비례대표명부를 주별이 아니라 전국 단위로 작성한다는 점만 독일과 다르다.

재신더 아던이 태어나고 멜리사 리가 이민 올 무렵 뉴질랜드 국민은 10년 동안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1994년 국민당과 노동당 양당만 승자독식 하던 소선거구 제도를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이 제도는 1996년 총선부터 도입·실시됐다.

1981년 총선 때 사회신용당은 무려 20.7%나 득표했지만 의석은 단 2석, 의석율 2.2%에 그쳤다. 1978년에도 사회신용당은 16.1%를 얻었으나 의석율은 꼴랑 1.1%를 점유했다. 1966년에도 사회신용당은 득표율 14.5%이었으나 의석율이 1.25%였다. 1984년 총선 당시 뉴질랜드당은 두 자리 수인 12.3%를 득표했지만 의석은 제로(0)였다. 1975년에도 사회신용당과 가치당의 득표율 합계는 12.6%였으나 역시 의석은 제로(0)였다. 각각 78.9%와 87.2%를 국민·노동당 두 거대양당이 의석을 싹쓸이 해버린 것이다.

이렇듯 1994년 선거제도 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10차례 총선에서 제3당은 최소 5.7%부터 최고 26.6%까지 유권자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나 5차례는 전혀 의석을 얻지 못했다. 나머지 5차례도 의석 반영비율은 민심 대비 10분 의 1에서 4분의 1 수준에 그친 정도였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ERC라는 시민단체가 중심이 돼 독일식 선거제도 도입운동을 시작했다. 국민투표 운동을 위해 5개 소수정당이 선거연합을 구성했고 노조와 일부 언론이 힘을 보탰다. 사표 방지와 비례대표 제도의 장점을 동시에 홍보하는 공식 슬로건도 내걸었다. 아주 알아듣기 쉬운 “Make your vote count!(여러분의 표를 계산에 넣도록 하라!)”이다.

오랫동안 기득권에 젖어 있던 양대 정당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드디어 정치개혁을 해냈는데 문제는 경제위기 때문이었다. 뉴질랜드 사례를 보면 “문제는 경제다.”가 아니라 “문제는 정치다”이다. 승자독식과 양당체제 아래 1970~80년대 20년간 뉴질랜드는 경제성장률 자체가 OECD평균의 73% 수준으로 침체돼 있었다.

어려운 경제에 갈수록 양극화는 심화되며 국민의 삶의 질은 오히려 나빠져만 갔다. 시민사회는 경제문제가 심각해진 근본적인 이유를 양대 정당이 결정권을 독점하는 불공정한 선거제도에서 발견했다. 국민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적 약자는 결정권이 없거나 거의 없는 소수정당일 수밖에 없는 선거제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민사회가 앞장서서 개혁여론 확산을 주도했다.

한편 1994년 선거제도 개혁 전 국민·노동당 양당은 전체의석을 독식했으나, 양당 안에서도 불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78년과 1981년 총선 때 국민당은 노동당보다 득표율에서 뒤졌으나 의석에서 앞섰다. 이와 반대로 1987년 총선에서는 노동당이 의석에서 득표율 대비 23% 이상 큰 이득을 얻었다. 소선거구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 한국도 13대 평민당과 20대 민주당이 비슷한 이득을 취한 바 있다.

하지만 1994년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개혁한 이후 국민당과 노동당은 다른 소수정당과 함께 매우 공정한 의석을 배정받고 있다. 경쟁정당에 비해 결코 불리한 대접을 받는 일이 없어졌다. 따라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반드시 소수파만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민주당과 한국당 일부에서 우려하듯 소수파가 과다 대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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