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 대한 인상은 처음 본 그 몇 초 만에 결정 납니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책 역시 첫 장을 펼쳐보는 순간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곤 합니다. 극단적인 기대감은 마지막까지 읽게 만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첫 장에 승패가 갈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쉽게도 <도망자>는 당연함을 거부하고 위기를 자초했었습니다.

멜기덱은 우리 사회의 부패한 기득권이다

초반 시청자들을 강력하게 흡입하지 못한 <도망자>는 단순하게 감정에 호소하는 <대물>에 밀릴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최근 성공한 드라마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시청자의 기호에 충실하고 감정을 자극해 단순명쾌하게 정리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추노>가 만들어낸 시청자들과의 교감에 너무 기대를 많이 했던 제작진들은 단순한 명제를 외면했습니다. 당연하게 그들의 세계에 시청자들이 함께 할 것이란 생각은 오판이었습니다. 그렇게 진행된 그들만의 이야기 전개는 초반 맥을 잡지 못하고 시청자 이탈 현상을 관망할 수밖에 없었지요.

한 여인이 겪은 죽음의 고통과 친구 살해범으로 오해받고 있는 탐정이 만나 거대한 세력에 맞서 그 뒤에 숨겨진 흑막을 거둬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도망자>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드라마입니다. 해외 촬영과 매회 등장하는 액션이 주는 재미보다는,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드러나기 시작하며 진정한 <도망자>의 매력이 발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멜기덱이라는 존재가 밝혀지는 순간 이 드라마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많은 이들은 깨달았을 듯합니다. 탐욕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사람마저 이용하려는 카이는 차에 올라타기 전에 비서에게 "멜기덱에게 가자"라고 합니다. 정체는 이미 지난 시간에 드러났지만 명확하게 언질을 한 그 주인공은 거대한 힘을 가진 양두희 회장이었습니다.

양회장이 진이 가족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것은 카이와 만나 나눈 대화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멜기덱이라는 용어를 직접 언급하게 한 이유는 양회장과 카이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사라진 엄청난 금액의 금괴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진이가 가지고 있는 조선은행권 화폐에 모든 단서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금괴의 행방을 찾는 카이에게 양회장은 그 모든 돈들은 자신만이 아닌 동업자 모두가 누린 혜택이라 이야기합니다. 여전히 숨겨진 거대한 금괴와 미발행 지폐 등을 공개해 권력자가 된 멜기덱들을 위기에 몰아가려는 진이의 가족들을 모두 죽게 만들었습니다.

친일파의 득세와 한국 전쟁 당시 사라진 엄청난 양의 돈의 행방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고리입니다. 친일파 척결을 하지 않고 그들을 권력의 중심으로 이끈 지난 독재자들로 인해 여전히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득세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극중 발언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바로 그들이 멜기덱들이기 때문이지요.

척결되었어야 했던 친일파들은 자신들이 차지한 엄청난 양의 자금을 통해 급속하게 기득권세력이 되고 모든 권력을 쥐게 되었음을 <도망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부모를 죽인 원수를 찾기 위해 시작된 이야기가 거대한 음모와 권력에 대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어가는 중요한 전환이 이번 주 방송분에서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도망자>는 상명하복에 능하고 조작된 진실에 속수무책인 국가권력의 현실을 붙잡힌 지우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교하게 조작된 서류만으로 한 사람의 운명을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음을 지우의 사례를 통해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패를 송두리째 쥐고 흔들고 있습니다.

"답은 듣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다"

라는 지우의 이야기는 진실을 찾기 힘든 현대 사회에서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는 서글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언제든 거대한 힘에 의해 쉽게 조작이 가능한 사회에서 진실은 무지개 저 너머에서도 찾기 힘든 게 우리가 사는 사회이니 말이지요.

가장 가까운 존재마저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점점 혼란스럽기만 한 진이는 결정적 증거들이 완벽하게 구비된 탐정 지우의 상황 때문에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진실을 찾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모호한 그들이 결국 선택해야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답을 듣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라는 지우의 대사는 <도망자>의 가장 중요한 행동 양식이 되었습니다.

8회까지 마무리된 현 시점에서 중요한 변수가 등장했습니다. 지우를 살인범이라 확신하고 있던 형사 도수가 완벽한 증거 앞에서 사실을 알아가는 계기를 가지게 됩니다. 검찰 송치 중 탈출할 가능성이 높은 지우로 인해 조작된 진실을 파헤치는 역할은 도수의 몫이 되고, 그렇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증거들은 적이었던 지우와 함께 진실을 찾아가는 가장 든든한 파트너로 변할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조선은행권 화폐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모두 적이다"라는 카이의 말은 오히려 카이를 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사건이 해결되면 될수록 의문만 가득해지는 상황에서 진이는 자신이 유일하게 믿었던 카이가 자신의 가장 큰 적일 수도 있음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합니다. 약속은 꼭 지키는 탐정임을 스님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이지요.

특별하지 않았던 탱화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황. 당연한 진실도 상황에 따라서는 조작될 수 있는 현실. 그렇게 조작된 진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환하게 웃을 수 없는 진이의 모습은 카이가 아닌 지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합니다.

멜기덱은 카이가 이야기를 했던 양회장만이 아닌 다수의 존재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과 권력을 손에 쥔 존재들의 총칭이자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악이 바로 멜기덱이지요. 멜기덱의 뜻은 작가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겠지만, 그가 만들어낸 멜기덱의 정체는 제국주의 미국의 권력을 지칭하기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을 지칭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진실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거대 권력에 의해 쉽게 조작된 것일 수도 있음을 <도망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위해 개인의 진실을 조작해 쉽게 제압해버리는 지배자의 습성을 잔인하게 보여주는 <도망자>는 많은 이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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