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는 전편이 나오고 무려 20여 년 이상이 흐른 후에 제작된 영화입니다. 그래서 제작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자연스레 '왜 이제 와서 속편을 만드는 걸까?'하는 의문이 생겼었어요. 물론 앞서 스티븐 스필버그도 <인디아나 존스: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을 <최후의 성전>으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나 만들긴 했으나, <인디아나 존스>야 워낙에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던 시리즈였기에 의아함보다는 반가움이 앞섰었죠. <월 스트리트>도 수작임은 분명하지만 이 시점에 속편을 제작한다는 건 의외였습니다. 그렇다고 올리버 스톤 정도 되는 사람이 소재 고갈에 허덕여 얄팍한 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닐 테고...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니 삽시간에 올리버 스톤의 의중을 알겠더군요.

전편이 나온 1980년대의 미국은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 시달리면서 대공항 이래 최악의 경기침체에 시달렸습니다. 이를 타개할 일환으로 레이건 정부는 '401K 플랜'을 발동했고, 대다수의 근로자들은 자신의 연금을 가지고 간접투자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이를테면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펀드투자 붐이 일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이르게 됐던 것이죠. 그 결과로 미국의 주식시장은 호황을 누리게 됐다고 하지만,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법입니다. 주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이라면 여기서 어떤 폐해가 발생했을지 금세 감을 잡으실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식으로 '장난치는' 족속들이 생겨났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희생자는 개인 투자자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죠.

그렇다면 불과 3년 전의 미국은 어땠을까요? 그 유명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발하면서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무너지며 1980년대보다 더한 경제위기를 맞았고, 더 나아가 전 세계의 경제가 몰락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로 인해 '대공황 이후 최악'이란 표현을 1980년대로부터 이양 받은 시기가 바로 2007년 이후가 됐습니다. (제길... 몇 년째 묶여있는 내 주식은 대체 어쩔거야!!! ㅠ_ㅠ) 그러니 모르긴 몰라도 전편의 제작 배경이 그랬을 것처럼,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를 기획한 올리버 스톤은 이번에도 그 원흉을 두고 신랄하게 지적하고 싶었을 겁니다.

1987년에 제작된 <월 스트리트>에서는 젊은 주식 중개인 '버드 폭스'가 부에 대한 야심을 이루고자 주식시장의 큰손인 '고든 게코'와 결탁합니다. 탐욕으로 가득찬 고든은 도덕적으로 비난을 면치 못할 방법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는데, 주로 특정 기업의 주식을 저가에 매수하여 고가에 파는 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정당한 경로를 통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겠지만 고든은 타겟으로 삼은 기업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일례로 그는 주식시장에 미치는 자신의 영향력을 악용해 루머를 퍼뜨리는 것으로 주가를 폭락시킬 수도, 폭등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비열한 계략마저 서슴지 않던 고든을 만난 버드 역시 이에 가담해 많은 돈을 손에 넣어 상류층의 삶을 즐깁니다만,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신을 차리고 고든을 감옥에 보내면서 영화는 끝이 났습니다.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는 그로부터 세월이 꽤 흐른 시점임을 마이클 더글라스의 백발과 주름진 얼굴 이외의 것을 통해서도 센스 있게 시사하면서 막을 올립니다. 예고편에도 나왔었는데, 고든은 마침내 출소하면서 자신의 물건을 돌려받습니다. 손수건, 시계 그리고 반지에 이어 등장하는 물건은 바로 벽돌만 한 구형 휴대전화로, 1980년대에나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물건이죠. (참고로 <월 스트리트>에 보면 이걸로 고든이 해변을 거닐며 버드 폭스와 통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잠을 자고 있었던 버드에게 고든이 했던 말이 'Money never sleeps'입니다)

고든이 감옥에서 시간을 보낼 때 그의 딸인 위니는 월 스트리트의 한 투자회사에 근무하는 제이콥 무어와 사귀고 있었습니다. 제이콥은 회사로부터 145만 달러라는 거금을 인센티브로 받을 만큼 유능한 인재인데, 하루는 그의 회사가 별안간 부도 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급기야 자신에겐 각별한 존재였던 대표가 출근길에 자살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져 비탄에 빠집니다. 그 직후 제이콥은 고든 게코가 출소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가 그를 찾아가고, 위니를 매개체로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고든으로부터 자신의 회사가 부도에 이른 배경 및 대표의 자살에 관한 정보를 얻습니다. 이를 이용해 제이콥이 복수를 다짐하면서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는 본격적인 전개를 맞이합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월 스트리트>는 당시 극심한 경기침체 속에서도 주식시장이 활황을 맞으면서 불거진 암울한 단면을 파헤친 영화입니다. 극 중에서 고든 게코는 노조를 속여 회사를 인수한 후에 고용보장조차 해주지 않고 비싼 값에 팔아넘길 속셈만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든 게코'는 주식시장을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채우던 비열한 존재를 대표하던 캐릭터였습니다. 올리버 스톤은 <월 스트리트>에서 이와 같은 작자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량한 희생자들이 생기게 됐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또 짐작케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이 탐욕을 채우고자 어떤 과정과 방식을 거쳤는지도 묘사하며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영화에 올리버 스톤 이상으로 잘 어울리는 감독이 있겠나 싶습니다. (장르는 조금 다르지만 마이클 무어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개인적으로 <식코>를 보면서 그는 맹목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니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불러온 작금의 참극을 반골기질이 다분한 올리버 스톤이 가만히 내버려둘 리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혹자들은 누군가가 나서서 원흉을 지탄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가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를 보기 전에 기대한 바도 바로 그러한 부분이었습니다. 전편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경제위기로 몰아놓은 탐욕과 위선으로 가득찬 자들을 신랄하게 까발려주기를 바랐죠. 실제로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올리버 스톤은 인터뷰에서 "누구도 책임을 지거나 감옥에 가지 않았다"라며 강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는 제 기대와는 사뭇 다른, 그래서 다소 실망스런 작품입니다.

분명 이 영화는 경제위기의 주범들을 겨냥한 듯한 사건을 다루면서 시작합니다. 제이콥 무어가 근무하던 회사가 부도에 처하고 대표가 자살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 그러한데, 그 과정에는 전편과 동일한 방법이 쓰였습니다. 고든 게코처럼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가 루머를 퍼뜨려서 주가를 폭락하게 만들었던 것이죠. 고든으로부터 정보를 얻은 제이콥도 동일한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엿을 먹이며 복수를 시작합니다. (증권가의 루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주식에 전혀 관심 없는 분들도 이른바 '증권가 찌라시'로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벌써 사람 여럿 죽었고 지금도 죽이고 있죠)

전편에서의 버드는 극의 후반부에 다다라서야 고든에게 복수를 다짐하지만, 이렇듯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는 초반부터 통쾌한 복수극이 진행될 듯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이 복수의 색깔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짙어지기는커녕 빛이 바래게 됩니다. 무엇보다 정작 이야기의 초점이 다른 데 맞춰져 있습니다.

우선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는 전편에 비해 부정이 저질러지는 과정과 그 부정에 대항한 복수의 과정이 상당부분 생략됐습니다. 그 바람에 관객으로서는 영화가 끝나도 일종의 쾌감 내지는 '정의는 살아있다'류의 대리만족을 맞볼 여지가 대거 줄어들었습니다. 대신 올리버 스톤은 이로 인해 얻어진 여유분의 비중을 고든 게코와 그의 딸 그리고 제이콥의 관계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고든 게코는 감옥에 있는 동안 딸인 위니와 단절인 상태로 지냈다가 출소 후에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하고, 위니와 제이콥은 자신들 사이에 고든이 끼면서 갈등이 빚어지며 위기를 맞습니다. 스포일러니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올리버 스톤의 영화치고는 이리 봐도 저리 봐도 결말이 심하게 말랑말랑합니다. 특히 반전 이후에 결말을 매듭짓는 대목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올리버 스톤이 이럴 수가...)

전편으로부터 무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시간의 흐름은 자본주의의 심화를 가져왔으며, 물질만능주의는 도덕적 해이, 즉 모럴 해저드를 부추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버 스톤은 이 좋은(?) 먹잇감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제이콥의 어머니까지 부동산업자로 등장시키며 모든 재료를 다 갖췄으면서도 결과가 이러니 의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극 중에서는 수차례 모럴 해저드를 언급하지만 올리버 스톤은 이를 공격하기보다는 애둘러 표현하려 애쓰며 나름의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고든과 위니 그리고 제이콥을 통해 보여지는 인간미입니다. 올리버 스톤은 탐욕에 사로잡히지 말고 모럴 해저드에서 벗어나 양심을 회복하라고 하며, 아직은 그럴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남아있음을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애초에 극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란 예상은 충분히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주인공 캐릭터인 버드와 제이콥의 차이만 봐도 그렇습니다. 버드는 뒤늦게 양심을 회복하긴 하나 한때 자신의 야심을 누르지 못해 부정과 결탁했던 인물이지만 제이콥은 결코 정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굳이 비루한 현실에 입각하여 나누자면 전자에 비해 후자는 다소 허무맹랑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죠. (알고 보면 이것이 정말 비극입니다) 하지만 다시 말해 이는 곧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의 제이콥은 올리버 스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기대와는 달랐던 이 영화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결말이나 결말부에 흘러나오는 제이콥의 내레이션을 들어보면 감정적으로 호소를 하는 듯하여 이질감마저 느껴졌습니다. 올리버 스톤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유약해진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을 담은 것일까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올리버 스톤은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비록 영화는 별로였지만 그의 해명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동의를 할 수 밖에 없군요.


►주의 - 약간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감안하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난 다큐멘터리적인 감독인 동시에 이야기꾼이다. 이야기꾼은 해피엔딩의 가치를 믿어야 한다. 이 영화는 사랑과 탐욕에 대한 이야기다. 게코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결국 사랑을 택한다. 진부하다고? 진부할지라도 옳은 선택이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