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수현 기자]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가 도입된 지 1년이 지났지만 방송작가의 처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방송사가 표준계약서 문구를 자의적으로 수정하거나 독소조항을 추가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방송작가는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계약서를 쓰지 않고 일을 해왔다. 전국언론노동조합과 방송작가유니온이 2016년 실시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계약서를 쓰고 일을 하는 방송작가는 6.6%에 불과했다. 구두계약을 작성한다는 응답이 68.8%로 가장 많았고, “노동조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업무를 한다”는 응답도 24.6%에 달했다.

▲<집필 표준계약서 도입 1년, 김작가에게 무슨 일이?> 토론회 (사진=방송작가유니온)

문화체육관광부·방송통신위원회·과학기술정보통신부·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 부처는 지난해 12월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를 마련했다. 표준계약서는 방송사의 부당한 계약 취소 행위 금지, 작가 저작권 명시, 분쟁 해결 절차 등을 담고 있다.

다만 문체부가 마련한 표준계약서는 방송사의 의무 준수 사항이 아니라는 한계점이 있다. 표준계약서를 체결하지 않거나 방송사에 불리한 조항을 삭제해도 이를 제재할 방법이 없다.

실제 표준계약서가 도입된 후에도 방송작가의 처우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27일 열린 <집필 표준계약서 도입 1년, 김작가에게 무슨 일이?> 토론회에서 공개된 사례에 따르면 SBS·TBN·MBC 등에서 일하는 방송작가의 노동 불안정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지난 2월 SBS는 ‘뉴스토리’ 작가 7명 중 4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당시 SBS는 표준계약서에 독소조항을 넣어 작가 해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체부가 발표한 표준계약서 원본은 "계약 기간은…당사자 간 합의에 의해 변경할 수 있다"였지만 ‘SBS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는 "계약기간 중…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계약만료일 이전이라도 계약이 즉시 종료될 수 있다"였다. ‘합의’라는 문구가 ‘즉시 종료 가능’으로 바뀐 것이다.

SBS는 제시한 표준계약서에서 저작권도 작가의 몫이 아니라 회사로 귀속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SBS의 표준계약서는 “모든 저작재산권은 방송사에 귀속된다”고 돼 있다.

▲<집필 표준계약서 도입 1년, 김작가에게 무슨 일이?> 토론회 (사진=미디어스)

SBS 뉴스토리 작가 해고 사태는 방송사가 표준계약서를 악용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임경빈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정책국장은 “해당 작가들의 고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면서 “이들은 결국 프로그램에 복귀하지 못했고 담당 간부나 사측의 책임 있는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임경빈 정책국장은 “심지어 해당 프로그램의 작가라는 이력 때문에 다른 방송사 채용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까지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도미라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계약서 TF팀장은 자신을 SBS 뉴스토리 사태 당시 피해자라고 소개하면서 “SBS는 뉴스토리 사태가 법률적 분쟁의 영역이라면서 소송을 하라는 뉘앙스를 줬다. 이럴 때 소송에 나설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되겠나”라고 물었다. 도미라 팀장은 “당시 뉴스토리의 방송작가들은 아직 방송을 못 하고 있다”면서 “뉴스토리 신입작가도 그때의 충격으로 방송에서 나갔다”고 밝혔다.

TBN은 노동권을 침해할 수 있는 독소조항이 추가된 계약서 작성을 시도한 바 있다. TBN은 올해 4월 전국 지역국 작가를 대상으로 한 계약서 작성을 공문으로 내려보냈다. 계약서에는 ▲프로그램이 방통심의위 지적 또는 자체 심의 지적을 당할 시 해고가 가능하다 ▲구성력이 떨어지면 해고할 수 있다 ▲질병 등의 사유로 방송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 해고할 수 있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 후 방송작가노조는 항의를 했고, TBN은 독소조항을 삭제했다.

MBC의 한 시사프로그램은 계약 기간이 올해 12월까지였던 메인 작가를 추석 사흘 전 기습 고용 해지했다. 계약 기간 이전에 일방적인 고용 해지가 가능했던 것은 MBC가 업무위임계약서에 ▲“민법 제689조에 따라 ‘갑’ 혹은 ‘을’의 의사표시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독소조항을 넣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계약서에 불만이 있을 시 다음 계약에서 불이익을 당할 것 같은 뉘앙스를 전해 받았다 ▲웃으며 회의에 참석했는데, 회의가 끝나고 조용히 불러서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통보했다 ▲계약서에 적힌 기간보다 오래 일했지만, 그 시간에 대한 급여는 미지급됐다는 등의 제보가 나왔다.

임경빈 정책국장은 “문서로 된 계약서조차 없는 허허벌판에서 일하던 방송작가들에게 정부 기관인 문체부가 집필 표준계약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소식”이라면서 “그러나 지난 1년 동안 실제 방송작가들이 현장에서 마주친 상황은 냉혹했다”고 지적했다.

임경빈 정책국장은 “방송작가를 위한 별도의 표준근로계약서 제정과 도입이 시급하다”면서 “원고 집필이 중심이 되고 재방송료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집필 작가(드라마 메인 작가 등)들은 표준계약서를 제대로 적용하는 것만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신입 작가나 보도·시사·라디오 작가는 표준근로계약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경빈 정책국장은 “미국의 경우 작가의 권리와 업무 범위, 고료를 명백하게 명시한 계약서가 존재한다”면서 “우리가 방송사에 미국 작가의 시스템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미국이 아니다’라고 한다”고 밝혔다. 임경빈 정책국장은 “그런 식으로 후진적인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국제적인 콘텐츠 경쟁을 할 수 있냐”라면서 “방송사와 유관부처가 진지한 태도로 이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필 표준계약서 도입 1년, 김작가에게 무슨 일이?> 토론회에 참여한 임경빈 방송작가지부 정책국장, 이기태 문체부 박사, 신선아 민주노총 변호사 (사진=미디어스)

신선아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집필 표준계약서가 아니라 근로계약서 체결이 더 적합한 방송작가가 있다”면서 “이런 작가의 보호를 위해 ‘방송작가 표준 근로계약서’ 마련이 시급하다”고 제안했다. 신선아 변호사는 “실제 방송작가가 근로계약을 체결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면서 “노동부와 문체부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기태 문체부 방송영상광고과 박사는 “문체부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표준계약서를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기태 박사는 “법에서는 표준계약서를 제정하고 권고할 수 있다고 한다”면서 “법 검토도 받아봤는데 법으로 강제할 순 없었다. 다만 내년부터 문체부가 제작 지원을 하는 사업에 참여할 방송사에게 '스태프와의 고용계약'을 조건으로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집필 표준계약서 도입 1년, 김작가에게 무슨 일이?’ 토론회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이철희 의원, 바른미래당 이상돈 의원, 전국언론노동조합,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발제는 임경빈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정책국장이, 사회는 조돈문 한국비정규직노동센터 대표가 맡았다. 토론자로는 이기태 문화체육관광부 방송영상광고과 박사, 도미라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계약서 TF팀장, 신선아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 김동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강사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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