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드라마가 대중의 관심을 받을 때 주목받는 건 주로 주연배우들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잘 될수록 이른바 '현장 분위기도 좋았다'라는 후일담이 전해지듯 몇 달의 짧은 시간 동안 잠을 줄여 모두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매진해 가는 '특공작전'처럼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에서 '협업'의 시스템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기꺼이 주연배우들의 꽃받침이 되어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역할에 매진하는 조연배우들이야말로 어쩌면 드라마의 진짜 실력자일 수도. 2018년 수많은 드라마들이 명멸하고 그 속에서 스타들은 빛을 발했다. 하지만 그 스타들만큼 올해 우리가 드라마를 만끽하도록 해준 이들이 있으니 바로 누군가의 엄마, 아내, 유모로 등장했던 '그녀들'이다.

선과 악, 그 경계가 자유로운- 김혜은

손 the guest 박홍주 역의 김혜은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에서 주인공의 엄마 차매화로 출연 중인 김혜은, 커다란 덩치의 아들을 둔 엄마답지 않게(?) '모델' 같은 외모와 몸매의 '신세대 엄마'이다. 여주인공의 '이쁘다'는 말 한마디에 냉랭했던 분위기가 무색하게 좋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던 이 차매화 엄마는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아들 앞에서 '너 같은 애를 누가 좋아하겠냐'며 이율배반적인 모성을 토해 놓는다. '허당'과 아들에게 다하지 못한 모정의 안타까움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모성, 다시 한번 김혜은이 빛난다.

올해 김혜은은 분주했다. <라디오 로맨스>부터 시작하여 <너도 인간이니?>, <미스터 선샤인>, <손 the guest>,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 <남자 친구>까지 '열일' 중이다.

그런 가운데 김혜은의 존재를 부각시킨 작품은 뭐니 뭐니 해도 <미스터 선샤인>과 <손 the guest>이다. <미스터 선샤인>에서 어린 유진의 부모님을 죽인 양반집 며느리였던 그녀는 이후 조선 최대 갑부의 안주인이자 김희성의 모친 강호선으로 등장한다. 유진의 엄마가 죽어가며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들이댔던 비녀의 흉터를 영원히 목에 간직한 호선은 그 흉터만큼 묵은 마음의 부채를 지닌다. 하지만 그 부채만큼 깊은 것이 아들 희성을 지키려는 엄마의 마음. 이 '부채감'과 '모성'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 하던 호선, 화려하게 차려입은 외양과 달리 아들 앞에서는 혼비백산하는 마음 약한, 그리고 유진 앞에서 한없는 죄책감을 숨길 수 없는 이 복잡미묘한 캐릭터를 화려한 외모와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거 같은 큰 눈의 김혜은이 설득해낸다.

하지만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와 <미스터 선샤인>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모성의 딜레마를 설득해내던 김혜은이 <손 the guest>로 오면 돌변한다. 등장부터 당연히 박일도의 제물이려니 했던 국회의원 박홍주, 이미 젊은 시절 가족 집안 재단 학교의 선생으로 학생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력'이 의심되는 그녀는 지역구 시민들 앞에서 한껏 자애로운 미소를 띤 것과 달리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시청자들은 또 다른 '박일도'를 떠올리게 된다.

연민에 못 이겨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던 엄마에서 핏발이 서린 눈빛으로 악에 치받혀 자신을 거스른 사람을 때려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악마의 핏줄까지 선과 악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김혜은이란 배우는 각인되었다.

모성의 여러 얼굴- 김선영

땐뽀걸즈 박미영 역의 김선영

우리에게 김선영이란 배우가 '엄마'로 처음 등장한 건 아무래도 <응답하라 1988>의 선우 엄마일 터이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 뽀글 머리 파마에 동네 대소사에 빠지지 않는 천상 아줌마이지만 아빠 없이 두 아이 선우와 진주를 키우는 가정사에 택이 아버지와의 순애보까지 파노라마와도 같은 인생사의 그곳에 김선영 배우가 있었다.

하지만 김선영 배우를 그저 '엄마' 역으로만 한정하는 건 아쉽다. 2016년작 <원티드>에서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화장기 없는 얼굴의 프로파일러로 등장하는가 하면 같은 해 <쇼핑왕 루이>에서는 부산 쌍도끼 출신의 집사로 냉철과 허당의 썸녀가 되기도 하였고 2017년 <파수꾼>에서는 엄마 형사로서의 모성과 경찰로서의 사명감 앞에서 갈등하면서도 여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인 포지션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선영이 가장 빛을 발할 때는 역시 '엄마'일 때이다. 하지만 '엄마'라고 다 같은 엄마가 아니다. 2017년작 <란제리 소녀 시대>에서는 <응답하라 1988>과 같은 80년대의 엄마였지만 가부장적인 남편의 바람과 차별받는 아들과 딸, 그리고 메리야스 공장 식솔까지 품어내는 여장부이면서도 여자로서의 아픔을 삼켜내는 또 다른 80년대의 어머니 상을 재연해 냈다. 또한 <이번 생은 처음이라>나, <은주의 방>에서는 언뜻 보기엔 억척스러운 엄마이지만 88만 원 세대로서 꿈을 찾아 고민하는 딸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분한다.

그리고 이제 <땐뽀걸즈>에서는 투박한 작업복의 엄마로 돌아왔다. 조선소 용접공이었지만 정리 해고당하고 남편 없이 두 딸을 키우는 가장으로 '자신을 자른 회사에 가서 수모를 감수하며 일하는 엄마, 바람 같은 딸을 지키는 그녀의 방식은 작업복처럼 투박하지만 어떻게든 학교의, 가정의 품에서 지켜내려는 그녀의 시선은 딸을 놓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자신 때문에 다시 한번 해고 위기에 몰린 동료들을 위해서는 무릎 꿇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의리'의 엄마, 이 거칠고 정 깊은 엄마 김선영이 청춘 드라마의 중심을 잡으며 시청자의 마음에 연민 어린 감동을 전한다.

듬직한 어른- 이정은

미스터 션샤인 함안댁 역의 이정은

연극과 영화에서 이미 중견이었던 이정은 배우가 드라마 시청자들에게 각인된 첫 작품은 아마도 <오 나의 귀신님>일 것이다. 생활형 점쟁이 '서빙고 보살'로 등장한 이정은은 고객과의 만남이었던 선우의 엄마(신은경 분)와 코믹스러운 케미로 극의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예의 신기로 나봉선과 신순애의 든든한 길잡이 역할을 하며 시선을 끌었다.

그 이후 2015년 <송곳>에서 푸르미 마트 야채 청과 직원으로 주인공의 든든한 노조 동지 김정미였다가, <리멤버>에서 역시 주인공들이 만든 변두리 로펌의 듬직한 사무장이었으며, 2016년 <피리부는 사나이>에서는 남편을 잃고도 여전히 112종합 상황실을 지키는 여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월계수 양복점>의 공방을 지키던 금촌댁이라고 달랐을까. <도둑놈 도둑님>의 쿵푸 달인이던 권정희도, <쌈, 마이웨이>의 설희 엄마 금복도, 모두 믿음직스러운 이정은의 변신 캐릭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든든했던 이정은의 캐릭터가 대중에게 어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엄마가 아닌 <미스터 선샤인>의 유모 함안댁을 통해서이다. 핏덩이로 '배달'된 애기씨, 그 애기씨 고애신을 품어 키운,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유모 함안댁, 하지만 함안댁은 그저 유모가 아니었다. 의병을 하다 목숨을 잃은 부모님의 뒤를 따라 기꺼이 의병 활동에 헌신한 애기씨의 숨은 동지였고 보호자였으며 끝내 그녀를 지킨 '은인'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손 한번 못잡은 행랑아범과의 로맨스는 웃다가 설레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게 했다.

그 모든 '씬'이 설득되었던 건 이정은이라는 배우의 내공이었다. 그녀의 눈빛 하나로 송곳의 노조도, 의병의 신념도 설명시켜내고 그녀의 어수룩한 표정 하나로 시청자를 해제시켰으며 넉넉한 품새로 품어주는가 하면 그녀가 입맛 다셨던 짜장면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둔갑시켜버린 그 순간순간에 이정은이 있었다.

미워도 밉지 않은- 염혜란

라이프 강경아 역의 염혜란

미웠다. <도깨비>의 어떤 악역보다도 미움을 받았다. 동생이 남긴 유일한 딸, 하지만 이모인 지연숙에게는 그 조카가 그저 보험금으로 보인다. 남편보다도, 딸보다도 돈이 좋은 여자, 그래서 처절하게 몰락해가는 그 '이모'만큼 실감나게 우리 시대의 속물의 끝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 미움의 원흉은 끝내 이승에서 그 '벌'을 톡톡히 받으며 카타르시스의 산증인이 되었다. 그렇게 지연숙을 실감나게 밉게 그려내며 염혜란은 시청자 곁으로 훌쩍 다가왔다.

하지만 염혜란이란 이름보다 먼저 작품 속의 캐릭터로 우리는 그녀를 이미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16년 <디어 마이 프렌드>에서 결혼 생활 내내 골병이 들도록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정아 이모네 애증의 큰 딸로 마음을 후비며 등장했었다. <7일의 왕비>에서는 맛깔스러운 사투리와 그보다 더 맛깔스러운 연기의 유모로 '신스틸러'임을 증명해내고 <라이브>에서는 우리 옆집에 살 것 같은 '아들 바보' 엄마로 분한다. 그리고 한양이만큼 잊을 수 없었던, 돈 버느라 아들을 놓친 하지만 그래서 엄마 손으로 아들을 잡아넣을 수밖에 없어 가슴에 대못이 박힌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한양이 엄마로 우리는 다시 염혜란을 기억하게 된다.

염혜란이 늘 '우리 이웃'에만 머물렀던 건 아니다. <무법 변호사>에서는 온갖 귀금속을 주렁주렁 매달고 기성 시의 보이지 않는 손 차문숙의 오른팔로 고군분투했고 <라이프>에서는 조승우가 분한 상국대학 병원 총괄 사장의 오랜 측근으로 '전문직' 혹은 '고위직'의 옷을 갈아입으며 또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하지만 염혜란이 우리네 이웃의 그 누군가가 되어도 저 높은 지위의 그 누가 되어도 변함이 없는 건 세상 어딘가에 그런 사람이 있을 것만 같은 너무도 실감나는 그녀의 연기다.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톺아보기 http://5252-jh.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