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부산국제영화제가 15회에 이르렀다 싶었더니, 또 어느새 그 15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이 눈앞에 다가왔네요.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는 일이니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내년을 기약하는 것이겠습니다. 저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터울이 점점 더 짧게 느껴지고 있으니 1년쯤은 금세 흘러갈 거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모두 7편의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틀 동안에 본 영화만 해도 족히 8~9편은 됐을 텐데, 몇 년 전부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예매조차 하지 않는 것은, 결국 저의 열정이 점점 더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일 뿐입니다. 어쨌거나 부산국제영화제로 인해 며칠간 참 즐거웠습니다. 비록 이전과 같은 축제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국제적인 행사가 저의 고향 부산에서 열린다는 것만은 여전히 뿌듯합니다. 이럴 때만이라도 타 지역, 특히 수도권에서 문화의 특권을 누리시는 분들로부터 부러움을 사야하지 않겠습니까? ^^

침묵

▲ 침묵 (10월 8일 대영시네마)
<침묵>은 연쇄 살인범을 다룬 독일 영화입니다. 1986년에 주인공은 가깝게 지내던 남자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별안간 그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소녀를 성폭행하려다 말고 살해하게 되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이에 주인공은 충격을 받아 마을을 떠나버리지만 사건의 범인을 발설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 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시점에 우연히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사건이 발생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제야 심각성을 알게 된 주인공은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었던 마을로 다시 찾아가고... 한편 경찰에서도 과거의 사건과 동일범임을 알아차리고 수사를 진행해 나갑니다.

이상의 줄거리만 보면 모르긴 몰라도 우리에게 제법 익숙한 스타일의 영화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침묵>은 기존에 비슷한 소재를 다뤘던 영화들 - 그래봤자 우리나라와 할리우드가 전부지만 - 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쉽게 말해 <렛 미 인>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리메이크를 결사 반대했을 정도로 <렛 미 인>이 제게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공포영화의 클리셰인 뱀파이어를 색다른 시각에서 견지하게끔 만들어줬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뱀파이어 이엘리는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생을 살아가며 그 누구도 곁에 둘 수 없었던 외롭고 고독한 존재였습니다. 이를테면 굉장히 인간적인 시선을 부여한 셈이죠.

<침묵>은 극이 후반부로 다다를수록 살인의 동기를 변태적인 성욕이나 정신이상에 의한 살인충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습니다. 23년이 흐르는 동안 지속적으로 동일한 범행을 저지른 것은, 어쩌면 살인범이 주인공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말동무 하나 없이 살아가던 그에게 잠시나마 친구가 되어줬던 주인공을 찾기 위한 메시지... 그의 의도가 통했는지 결국 주인공은 그를 만나러 옵니다만, 과거에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던 자신을 저주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살인범이 큰 비탄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에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그리도 쓸쓸하게 보일 수가 없더군요.

암흑의 공포

▲ 암흑의 공포 (10월 9일 센텀 CGV)
<암흑의 공포>는 정말 무작정 표가 남아서 관람을 하기로 했던 영화입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아직 좌석이 있다길래 좀 의아했었죠. 일단 제목만 보면 대번에 공포영화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분명 인기가 많을 텐데 어째서 아직 매진이 아닌 걸까... 하면서도, 뭐 어차피 예매도 하지 않은 놈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이 영화는 제목과 달리 공포영화가 아니더군요. (그러면 그렇지!)

<암흑의 공포>는 이탈리아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이민자들의 현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이 일하던 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서 이탈리아로 건너옵니다. 그리하여 비슷한 또래의 여자가 있는 한 가정에 들어가 할머니의 병수발을 들면서 숙식을 해결합니다. 이와 동시에 한 여자를 찾아다니는데, 다름 아닌 주인공의 어머니였습니다. 그 역시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일찍이 이탈리아로 건너와 몸을 팔아 번 돈을 고향에 보내줬던 것이죠. 그 돈으로 주인공이 지금까지 생활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뭐 대충 이러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암흑의 공포>는, 사실상 불법이민자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이탈리아와 루마니아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의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이나 주인공이 머무는 집의 딸은 공히 생계를 위해 학업도 포기한 채로 공장에서 일을 하는 젊은 청춘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데는 결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서는 쉬이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의 대물림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심지어 주인공의 어머니는 딸을 위해 몸까지 팔아 돈을 벌었지만 비극적인 운명의 굴레를 벗겨낼 수 없었습니다. 영화는 굉장히 무겁고 또 차분하게 이어졌습니다. 딱 한번, 주인공과 주인공의 어머니가 마침내 만나서 지난날에 대해 설전을 벌이는 장면만은 굉장히 인상적이었으나 그 외에는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지루했다는 거죠.

하루와의 여행

▲ 하루와의 여행 (10월 11일 대영시네마)
오프닝에서 할아버지는 무언가로 인해 화가 난 모습으로 집을 나서고 손녀는 그런 할아버지를 쫓아가면서 시작합니다. 어머니의 자살로 몇 년간 단 둘이 지내왔으나 손녀가 직장을 찾아 도쿄로 가겠다고 말하면서 언쟁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할아버지는 자신의 형제들을 찾아다니며 여생 동안 신세를 지려고 합니다만, 세 사람 모두 사정이 여의치않습니다. 한편 손녀인 하루는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면서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여자와 재혼하여 살고 있는 아버지를 만났으나 하루는 지난 날의 울분을 토해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마지막에 하루와 할아버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나 결국 하루는 혼자가 됩니다.

저는 일본영화 중에서도 특히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는 드라마와 멜로를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의 드라마는 종종 자국의 사회적인 문제점, 즉 극도의 개인주의가 부른 가족관계의 붕괴와 의사소통의 단절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고독 등을 다룹니다. 할아버지와 손녀를 필두로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을 다룬 <하루와의 여행>이 가진 주제의식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손녀의 장래를 위해서 자연스레 숨을 거두는 할아버지를 보면 왠지 모를 처연함이 느껴집니다. 뭐랄까, 감독은 기성세대들의 무기력하고 쓸쓸한 퇴장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달까요? 그러면서도 영화는 우리가 언제나 기댈 수 있는 가족의 의미를 한번 되새겨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코바야시 마사히로 감독의 연출은 전형적인 일본 드라마의 그것과 일치합니다. 로드무비의 형식을 따와서 할아버지와 손녀를 뒤따라가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지만, 그 차분함 속에서도 주제의식은 길을 잃지 않으며 점진적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나마 하루가 아버지를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에 가슴 속의 응어리를 터뜨리던 장면만이 유일하게 자극적이었군요. 이 장면에서 하루 역의 토쿠나가 에리는 나이답지 않은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캐릭터를 위한 설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팔자걸음을 걷더군요. -_-;

댄싱 채플린

▲ 댄싱 채플린 (10월 9일 센텀 롯데시네마)
<댄싱 채플린>을 관람했던 건 순전히 수오 마사유키 감독 때문이었습니다. 수오 마사유키라고 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영화가 뭡니까? 바로 <쉘 위 댄스>죠. 그래서 역시 댄스를 소재로 했을 것이 틀림없는 이 영화를 망설임없이 택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댄싱 채플린>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지루했던 영화로 남게 됐습니다.

이 영화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대명사 찰리 채플린의 캐릭터를 발레로 이식한 실제 공연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수오 마사유키 감독은 이 공연의 준비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는가 하면 실제로 이뤄진 공연도 카메라에 담았는데,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작품이 <댄싱 채플린>입니다. 참고로 후반부에 보여지는 공연은 <황금광 시대, 모던 타임즈, 키드> 등 찰리 채플린의 대표작에서 일부 장면을 따와 발레로 연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지루했어요.

원래 뮤지컬이나 연극 등의 공연을 싫어하긴 하지만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자 제가 가진 인내심을 총동원해야만 했습니다. 중간에 참다못해 상영관을 빠져 나가는 관객들도 속출했죠. 발레도 좋아하고 찰리 채플린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아닌 다음에는 권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그나저나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부인이자 이 영화에 출연한 쿠사카리 다미요는 정말 많이 늙었더군요... <쉘 위 댄스>에서는 한 마리의 학이었는데... ㅠ_ㅠ

아웃레이지

▲ 아웃레이지 (10월 12일 대영시네마)
오랜만에 보는 기타도 다케시의 영화였습니다만 그의 센스는 여전하더군요. 예전에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찰리 채플린이 작두를 타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항상 개그맨답게 관객들을 빵빵 터지게 하면서도 기습적으로 살벌한 장면을 집어넣거든요. <아웃레이지>는 전작에 비하면야 날이 많이 무뎌졌지만 지금도 기타도 다케시의 살벌함은 건재했습니다. 그리고 살벌하게 웃기는 것도 변함이 없어서 여전히 그의 영화에는 유머와 폭력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그의 두 가지 직업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과 종종 오버랩됩니다.

기타노 다케시는 <아웃레이지>에서 다시 한 번 야쿠자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의 조폭영화처럼 괜히 똥폼 잡거나 의리를 앞세우고, 멋들어진 연출을 남발하지 않습니다. 그냥 뭐 있는 그대로 리얼하게, 잔인하게 보여줍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의리라곤 눈꼽 만큼도 없고 배신에 배신이 꼬리를 무는 더럽고 치졸한 야쿠자들과 거기에 붙어 기생하는 비리 경찰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도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코미디가 따로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도 응징이나 복수, 정의 따위는 없는 기타노 다케시의 리얼리즘은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실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비극입니다.

지금까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가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소규모 개봉이라면 염두에 둬도 좋을 만한 영화입니다. 적당히 웃기고 적당히 폭력적이어서 오락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평작 이상의 작품성도 겸비하고 있어 기본적인 관객수는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기타도 다케시 외에도 시이나 깃페이, 쿠니무라 준, 이시바시 렌지, 코히나타 후미요 등 낯익은 배우들도 많이 등장하고 있어 이질감을 한결 덜어줍니다. 특히 이시바시 렌지의 코믹한 역할(?)과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였는데, 뒤이어 감상했던 <도시의 이방인>에서는 또 상반된 캐릭터로 출연하여 그의 뛰어난 연기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과 록 싱어

▲ 스님과 록 싱어 (10월 13일 대영시네마)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현재는 스님이지만 과거에는 록 싱어이기도 했던 남자를 등장시킵니다.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음반까지 냈던 주인공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스님으로 귀의했으나 음악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한 고등학교를 찾아 강연을 하던 도중에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되고, 급기야 주지스님과 아내(!)에게 다시 한번 음악 공연을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자신은 음악 없이 살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며...중간에 난관도 있었으나 다행히 대다수의 주변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하기보다는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과 격려를 보내줍니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마침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절 앞에서 성대한 공연을 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스님과 록 싱어>는 제목만큼이나 독특하게 주제를 설파하는 꽤 종교적인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제가 가장 취약한 분야 중의 하나가 종교다 보니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솔직히 말해 아직도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제대로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보통 미흡한 시나리오나 연출을 탓하게 되는데 <스님과 록 싱어>는 참 희한하게도 어떠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그런 게 느껴집니다. 이 영화가 정말 허접해서 이해를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허접해서 영화를 이해하 못하는 것인지의 여부쯤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과 록 싱어>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그 중간쯤에 위치한 영화라고 판단하겠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등에 대한 주제의 깊이는 어림짐작이나마 할 수 있었습니다만, 감독의 나이(1980년생)에 걸맞게 굉장히 젊은 감각으로 포장된 이 영화의 면면을 모두 간파하기란 지금의 제게 불가능한 건 사실입니다. 중구난방식으로 다소 산만하고 난잡하다는 것만은 틀림없으나 졸작이라고 치부하기엔 망설여집니다. 엔딩 크레딧에서 울려 퍼지던 레너드 코헨의 원곡 <할렐루야>는 이러한 고민이 한층 깊어지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선 스님이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하는 모양이더군요. 굉장히 놀랐습니다. 땡중인 줄 알았는데... ^^; 참, 이 영화에서 정말 반가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로 주인공의 아내로 등장한 토모사카 리에! 보는 내내 분명 낯이 익은 여자다 싶었는데 엔딩 크레딧에서 그녀의 이름을 보고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흐른 세월에 비하면 아직도 참 곱더군요.

도시의 이방인

▲ 도시의 이방인 (10월 13일 대영시네마)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영화로 나카무라 토오루, 구보츠카 요스케 등 국내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배우들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하타노는 과거에 도쿄의 한 명문여고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제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학부모회 간부에 의해 파면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결혼생활도 지속하지 못하고 혼자 시골로 내려와 학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타노를 특별히 따랐던 여학생이 도쿄로 간 후에 행방이 묘연해졌음을 알게 되면서 그는 다시 도쿄로 돌아와 여학생을 찾기 시작합니다. 하타노는 소녀가 살던 집에도 가보고 친구도 만나게 되는데, 그럴수록 뭔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도시의 이방인>은 일본의 수도인 도쿄를 온갖 비리와 그로 인한 범죄로 가득한 도시쯤으로 비춥니다. 교사로 근무하던 당시에 하타노는 돈으로 딸을 명문학교에 입학시킨 학부모의 그릇된 행동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상대하기에는 벅차 도리어 하타노가 궁지에 몰리게 되면서 교사직을 박탈당해야만 했었죠.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도쿄의 학교는 예전보다 훨씬 더러운 비리로 얼룩진 공간이었습니다. 자신을 해임시키는 데 앞장섰던 자는 재단이사장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살인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소녀를 찾던 하타노는 해임 당시 유일하게 자신을 옹호해줬던 과거의 재단이사장이 그 때문에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만, 이번에도 진실을 밝히기는커녕 도리어 그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도시의 이방인>이란 제목은 타락한 공간을 상징하는 도쿄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비리와 부패에 침묵하지 않는 하타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를 핵심으로 하타노의 사랑이야기를 주변에 배치하여 진행되는 <도시의 이방인>은 조금 어정쩡한 영화가 되었습니다. 복합적인 소재를 다루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만 무엇이 주가 되고, 무엇이 부가 되어야 하는지를 적절히 조율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울러 사카모토 준지 감독 나름대로는 리얼하게 보이고자 연출한 액션씬은 종종 관객들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제가 봐도 특별한 작법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더군요. 확실히 사카모토 준지의 연출은 기타도 다케시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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