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육상은 부활의 신호탄을 쏘며 뭔가 성과를 내는 듯 보였습니다. 육상 기대주 김국영이 지난 5월 전국실업육상선수권 남자 100m에서 31년 묵은 한국 기록을 갈아치운 데 이어 몇몇 종목에서 아시아 선두권에 오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상 제도 확대, 체계적인 훈련 방식이 우수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 덕에 의미 있는 쾌거가 잇달아 나왔다고 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10년 10월, 폐막을 하루 앞둔 제91회 전국체육대회에서 한국 육상은 엄청난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불과 한 달밖에 안 남겨둔 시점에서 기대했던 선수들이 연달아 부상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 육상 단거리를 들썩이게 할 것으로 기대됐던 박봉고가 남자 200m 결선을 뛰다 다리 경련으로 쓰러졌고, 추후 진단을 받은 결과 최소 3개월 동안 운동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졌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또 다른 간판 여호수아도 부상을 당해 사실상 아시안게임 참가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주축 선수들은 컨디션 난조로 자신의 최고 기록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내면서 아시안게임 전망에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무엇보다 더 큰 시합을 앞두고 크게 무리하지 않았어도 됐을 상황에서 각 시도 선수단의 무리한 출전 요구와 주변의 갑작스러운 과도한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부진한 성적을 낸 선수들이 적지 않아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내년 세계 육상 선수권을 치르는 나라지만 정작 이 무대를 빛낼 선수 관리 면에서 아직은 뭔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 씁쓸함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 한국 육상의 장기적인 스타 발굴 프로그램인 '드림 프로젝트'를 통해 올랜도에서 훈련하고 있는 조규원(왼쪽부터), 김국영, 박봉고 ⓒ연합뉴스
100m 한국신기록 보유자 김국영은 지난 여름 육상연맹이 실행한 '드림 프로젝트'를 위해 미국으로 나가 훈련한 뒤 과도한 부담감과 심리적인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이번 전국 체전 기간에 컨디션 난조에 빠졌습니다. 김국영 스스로 "너무 부담이 됐다. 출발과 함께 머리가 하얗게 변했고 몸이 나가지 않았다. 아침을 먹다가 토했을 정도"라고 털어놨을 만큼 어린 선수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기까지 했던 주변 부담이 결국 나쁜 성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선수 스스로 아주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김국영의 발언을 돌이켜보면 의외로 주변 여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기술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다소 아이러니한 이 상황은 준비 과정에서 과연 무엇이 잘못 됐는지를 따져봐야 싶을 정도가 아닌가 생각됐을 정도였습니다.

기량이 좋은 어린 선수들을 잘 키우고 관리하려면 그만큼 지도자의 역할과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선수가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뒷받침돼야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수영 박태환이 베이징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심리치료사가 전담으로 따라다녔던 것이 바로 심리적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국영의 이번 부진이나 박봉고의 안타까운 부상을 비춰보면 장기적인 안목보다는 당장의 성과에만 너무 집착하고 이를 과도하게 부추긴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이미 육상계 내부적으로도 2011 대구 세계 육상 선수권에서 메달권 성적을 낼 선수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언론, 여론의 압박 때문에 성과주의에 집착하고 그로 인해 너무 무리하게 선수의 훈련 환경을 바꾸고,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줬다는 것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 됐습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당장의 성과를 기대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언론들의 보도 행태입니다) '드림 프로젝트'라는 명목 하에 미국에서 훈련했다는 이유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면서 연맹 관계자와 육상계 내부적인 압박이 결국은 선수들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부추겼다는 얘기인데요. 어떻게 보면 '넌 이런 혜택을 받았으니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낳은 '대형 사고'가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이미 육상계 말고 체육계 전반적으로도 이런 현상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종목이나 마찬가지지만 이번 박봉고의 부상과 김국영의 구토 사건은 어린 선수들을 어떻게 해야 잘 키울 수 있는지를 돌이켜보고 개선해 나가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의 이익에만 급급하고 몇몇 선수들만 키워 '선택과 집중'을 하려는 것보다 기량 좋은 어린 선수들이 골고루 잘 성장해서 가능한 여러 선수들의 기량이 덩달아 좋아지고, 선수들의 기초적인 실력이 튼튼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시스템 확산이 더욱 필요해 보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육상계 내부적으로는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로 진땀을 흘릴 수 있겠지만 그보다 우리가 정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육상 선수들이 경쟁력 있는 실력을 갖추면서 동시에 어떻게 해야 나은 여건 속에서 마음 놓고 운동할 수 있을지를 깊게 들여다보고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포츠 경기의 주인공이 바로 경기장을 누비는 선수들이라는 것을 좀 더 깊게 생각하고 인식하며 선수가 마음 편하게 운동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육상계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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