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징하고 있는 건 뭘까요? 양 가문의 반대도 갈라놓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 연인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지고지순하고 일편단심인 사랑? 혹은 젊은 남녀로 인해 촉발된 그놈의 사랑문제 때문에 여러 사람이 졸지에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비극? 참 진부한 표현이지만, 뭐가 어쨌든 <로미오와 줄리엣>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로맨스의 대표작입니다. 설사 저처럼 원작을 읽어보진 않았어도 영화 한 편쯤은 다들 보셨을 거에요. (아... 올리비아 핫세여...)

쓰여진 지 수백 년도 더 지난 작품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토록 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아마도 저마다 순수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 혹은 동경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혹자는 요즘의 세태가 이혼율이 높아지고 정신적 사랑보다는 일순간의 육체적 쾌락을 좇는 이들이 많아졌다며 한탄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작품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건 그만큼 적어도 아직까지는 희망이란 게 남아있다는 방증입니다. 정말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사람들의 감정이 메마르고 사랑을 갈구하지 않게 된다면, 그때가 로맨스 소설 따위는 좀처럼 읽히지 않는 세상이겠죠.

<로미오와 줄리엣>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도 어쩌면 각 개인에게 이와 같은 지표를 제시해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를 보고 가슴이 아리거나(싱글) 따뜻해진다면(커플) 여러분은 지금 사랑이라는 감정을 기억하고 있다는 걸 의미할 테고, 반대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가슴이 차츰 식어가고 있음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레터스 투 줄리엣>의 주인공 소피는 '뉴요커' 매거진에서 자료 조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자료 조사원이 하는 일이란 각종 기사에 쓰일 자료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피는 언젠가 근사한 책을 쓰는 작가가 되기를 희망하며 약혼자 빅터와 베로나로 이른 허니문을 떠납니다. 하지만 낭만적인 한때를 꿈꿨던 소피와 달리 빅터는 베로나에 와서도 곧 개업하게 될 자신의 레스토랑에 정신이 팔려 온통 그 일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심지어 그는 소피에게 따로 갈라져서 각자 원하는 일을 하자는 제안을 하기까지에 이릅니다.

결국 소피는 홀로 베로나를 거닐다 줄리엣의 생가에 들리는데, 그곳에는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여성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담아서 줄리엣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쓴 편지를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속삭였던 발코니 아래의 담벼락에 붙이고 있었죠. '어차피 답장은커녕 누가 읽어보지도 않을 텐데...' 라고 생각할 찰나에 웬 여자가 와서 그 편지를 죄다 뜯어갑니다. '뭐지? 설마 저걸 그냥 다 버리는 건가?'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에 소피는 그 여자를 뒤쫓는데, 알고 보니 버리긴 커녕 일일이 편지에 답장을 해주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네요!

이리하여 소피는 그들과 함께 전 세계 여성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편지에 답장을 해주는 일에 동참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50년 전에 쓰여진 한 편지를 발견하고는 뒤늦게나마 답장을 보내주는데... 맙소사, 편지의 주인공인 할머니가 손자와 함께 베로나로 불쑥 날아왔습니다. 과거에 부모님의 반대가 두려워 자신이 이별을 고했던 남자를 추억하면서...

자,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는 훤히 보이시죠? 할머니는 옛 연인을 찾고자 하고, 소피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할머니를 도우는 한편으로 그토록 원하던 책을 쓰는 데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손자인 찰리까지 포함한 세 사람은 베로나와 시에나를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 와중에 티격태격하던 젊은 남녀는... 뭐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결혼을 앞둔 남자가 이제 보니 자기에게 무관심하더라는 설정은 다소 치졸하게 보이지만, 뭐 그것도 '레스토랑의 개업'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안겨주고 있어 웬만큼의 설득력은 가지더군요.

다만 이건 뻔해도 너무 뻔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뻔하다면 결국 관건은 그것을 '어떻게' 펼쳐보이느냐인데, <레터스 투 줄리엣>은 새로움을 보여주지 못한 채 뻔한 전개와 연출로 수를 놓습니다. 약간의 반전을 배치해도 좋을 법한 지점이 있었음에도 매번 티끌만한 오차도 남기지 않고 직선으로 내달리기만 합니다. 게다가 베로나와 시에나의 이국적인 풍경을 주무기로 삼고 있다는 것은 얄팍한 전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긴 이걸 외면한다면 그거야말로 미친 짓이긴 하죠) 특히 시종일관 지나치게 관객의 감성을 공략하고자 하는 연출을 일삼고 있으며, 수시로 극적인 전개를 위해 필요한 대목을 그저 우연과 찰나의 변심, 추측에 기대고 있다는 것은 감정이입마저 방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찰리가 소피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장면은 꽤 뜬금없습니다. 찰리는 줄곧 소피의 괜한 짓으로 인해 행여나 할머니가 상심하게 되실까 봐 노심초사하며 까칠하게 굴던 녀석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두 사람간의 벽을 허물어줄 뚜렷한 계기를 뒤로 한 채 성급하게 감정선을 이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이 뒤에 찰리가 소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도록 유도하는 에피소드를 배치하고 있다는 점은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오판한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종국에 이르러 <레터스 투 줄리엣>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찾아왔다면 망설이지 말고 쟁취하라는 것이죠. 그러나 소피가 단 며칠간의 동행에서 정을 붙인 남자 때문에 일로 바쁜 약혼자를 내치려 한다는 것은 주제와 딱히 부합한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결혼을 약속한 남자에게도 실망하는데 고작 며칠을 보낸 남자가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 어찌 확신하고 타인에게 상처까지 준단 말입니까. 그건 순전히 착각이죠. 저로서는 굳이 이러한 설정을 더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는 기혼자들이 결혼한 후에야 꿈에도 그리던 사랑이 찾아왔다고 운명을 저주하면서 불륜을 미화하는 행위와 다름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영화 자체가 마냥 감성적이고 캐릭터의 심리 변화를 어필할 만한 설득력이나 개연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터스 투 줄리엣>은 이들의 사랑을 역시 미화하는 데 주력합니다. 그리고 이성과의 연결고리를 조금 느슨하게 하고 바라보면 꽤 달콤하고 낭만적이며 가슴이 뭉클해지기까지 합니다만... 이 또한 상당부분 조력자로서 기여했어야 할 할머니의 사랑이야기가 오히려 전면에 나서며 후반부에서 큰 공을 세운 덕분입니다. 반면 소피와 찰리의 그것은 결말에 이르러 변함없이 성급하고, 심지어 손발이 오그라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패러디(절대 오마주가 아니라 패러디!)까지 선보입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상호보완을 하거나 서로 조화를 이루며 흘러가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한쪽의 맹점을 더욱 돋보이게 드러나도록 하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맙니다. 기다림의 미학을 보여주면서도 한쪽으로는 마음이 움직일 때 얼른 행동하라고 하니 이율배반이 따로 없습니다.

마침내 영화가 끝나고 나면 기억에 남는 건 베로나와 시에나의 풍경 그리고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미모입니다. (그래서 별을 세 개나 줬다!) 뭐 '카르페 디엠'처럼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건 좋습니다. 허나 적정선의 이성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마냥 예쁘게만 포장하려는 사랑이야기에는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달콤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두 시간 가까이 먹고 있으면 물리기 마련이니까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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