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차례 강조했지만 이 나라에서 사회적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첫째, 기업이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더 이상 생산성 향상을 모색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노동 내부의 격차로 양극화가 심화돼 단일한 이해관계를 상정한 전선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 셋째, 저성장 국면에서 어쨌든 일자리를 나눠야 한다.

그렇다면 22일 출범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라는 틀로 이런 문제를 해소할 사회적 타협을 가능케 할 수 있을까? 그건 장담하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합의에 힘을 실어주고 사실상의 의결기구처럼 운영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지만 말이 공수표가 되는 건 한순간이다. 여전히 명문화된 경제사회노동위의 지위는 대통령 자문기구이다.

대통령 자문기구가 어떤 방식으로 쉽게 빈 껍데기가 될 수 있는지는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산하 재정개혁특별위원회의 과세 관련 제안이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되짚어보면 된다. 재정개혁특위는 지난 7월 재정개혁 권고안을 통해 종부세 강화에 관한 방안을 복수안으로 제시했다. ‘복수안’의 대부분 내용은 애초 예상된 수준에 미달한다고들 평가했다. 정부 의견을 반영한 결과였다. 잘 알려졌다시피 실제 나온 정부안은 이보다도 후퇴한 수준이었다. 재정개혁특위 소속 위원들의 비분강개가 일부 언론을 통해 전해졌지만 그때뿐이었다.

실질적 권한이 뭔지 정확히 확인이 되지 않는 기구의 결정사항이 과연 관철이 되는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정권이 경제사회노동위의 존재 의의를 정확히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인지도 의구심이 남는다. 정권이 경제사회노동위를 통해 시급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안건이 무엇인지를 보면 그렇다.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장은 22일 CBS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의 인터뷰에서 민주노총의 참가 여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국회에서 탄력근로제 논의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해왔고 노동시간제도개선위를 만들어서 논의할 것인데 이게 또 지뢰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 확대에 동의하되 하루 노동시간에 제한을 두거나 연장근로수당을 주지 않는 문제에 대한 보완책 등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노동계가 반대하는 문제를 이미 대통령과 여야가 합의를 해놓고 “그냥 해달라”는 식으로 동의를 요구하는 셈이다.

이 발언으로 비추어 보면 어떤 형식으로든 노동계가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 확대에 동의해야 경제사회노동위의 본격적 활동이 성공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이미 과거 노사정위원회나 이전 정권의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의 사례를 볼 때 노동계의 백기투항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노동계가 뭔가를 ‘합의’해줬다는 사실만 남고 나머지는 각자 하고 싶은 일을 그대로 하는 결말이 유력하다.

사실 경제사회노동위의 권한을 보장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도 “합의를 하면 국회도 반드시 존중해줄 것으로 믿는다”, “탄력근로제를 논의하면 국회도 그 결과를 기다려 줄 것이다. 대통령도 국회에 시간을 더 달라고 하겠다”는 것 정도이다. 정부 여당이 목을 매는 의제도 국회에선 처리가 안 되는 게 현실이다. 하물며 보수세력이 벌써 경제사회노동위가 노동계에 기울어진 형태로 구성됐다며 불만을 표시하는 중이다.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차피 민주노총은 내년 1월에나 참가를 결정할 것이니 숙제를 먼저 처리해놓겠다는 것인가? 이를 민주노총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이 정권은 사회적 대화와 타협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노동계의 한 축인 민주노총이 쉽게 참가할 수 없는 조건만을 계속해서 쌓아왔다.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했고 노동시간 단축을 무력화시켰으며 무분별한 규제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거기다가 정권의 주요 인사들이 직접 나서 말로 압박을 가해왔다. 민주노총이 경제사회노동위를 참여하느냐는 결국 정치적 문제이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참여하고 싶다는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지만 실행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가가 어려운 정치적 조건을 만들어 놓고 참여를 하라 하니 그게 되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첫 회의에서 재계·노동계 대표들에게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소한 설득이 되려면 노사가 모두 양보해야 합의가 된다는 공자님 말씀이 아니라 자본에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맞춰보겠다는 취지의 실제적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민주노총 등이 애초 사회적 합의 기구 참여의 선행조건으로 언급했던 ILO협약 비준은 경제사회노동위에 와서 얘기하자고 하고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철회는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입법으로 근본적 해결을 하겠다고 한다. 전후가 바뀌었다.

내친김에 이 정권 사람들이 과거 언급한 네덜란드 모델을 다시 볼 필요도 있다. 네덜란드의 사회협약은 민간기구인 노동재단과 법적기구인 사회경제협의회라는 두 개의 협의기구를 통해 이뤄졌다. 여기서 노동재단은 중앙집권적 단체교섭이 이뤄지는 장이기도 했다. 단위사업장 내의 합의 구조는 직장평의회를 통해 유지됐다. 즉 산별 등 집단교섭과 노동자들의 경영참여, 그리고 이를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는 높은 노동조합 조직률 등이 실효적인 사회적 합의의 전제였던 것이다.

물론 당장 완벽한 조건을 만들지 않으면 경제사회노동위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무리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큰 방향에서 포괄적인 공감대가 노정간에 형성돼야 그 다음 얘기를 할 수 있다. 집단교섭 강화와 노동자의 경영 참여 확대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다. 적어도 노동조합이 더 적극적으로 노동자를 조직할 수 있는 제도적 보장이라도 모색해줘야 한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이 모든 문제를 경제사회노동위에 가지 않으면 얘기를 못할 분위기다.

이 정권은 공약 이행이 불투명하게 될 경우 공론화위원회 등을 만들어서 공을 넘기고 여기서의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변화된 조치를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지금 상황이라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도 딱 그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와 타협은 실효적이어야 한다. 한 번 할 때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개문발차’를 했다니 들러리가 아니라 실제로 사회적 변화를 이뤄내는 것에 방점을 찍어보라. 이런 저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흔들리지 않는 사회적 합의 구조를 실질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면 따로 설득할 것도 없이 민주노총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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