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팟캐스트 방송에서 미국 중간선거 직후 남북관계에 대한 말한 일이 있다. 북미 양측의 최상층부가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온 이상 판을 깨는 일은 없겠지만 교착국면이 장기화 될 우려가 있다는 얘기였다. 최근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불행히도 이런 시나리오에 가까운 상황이 조성되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어찌됐건 간에 북미대화의 진도를 내게 해온 동력은 크게 두 가지 였다. 첫째는 여러 이유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 합의를 ‘전격적’으로 도출해냈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간선거라는 일종의 ‘타임 리미트’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싱가포르 합의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중간선거를 의식해 판을 완전히 뒤엎을 수 없다고 보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협상 국면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보여 왔다. 중간선거 직전까지 쟁점이 대북제재 해제와 핵신고의 교환 조건이 돼버린 것은 이 결과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트럼프 행정부의 퇴로를 막아버렸다. 싱가포르 합의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 공화당 주류와 민주당 관련 인사들의 대북협상회의론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고, 불충분한 수준에서 합의하는 것은 반대파들에게 빌미를 주는 게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는 적당한 수준에서 ‘대화를 위한 대화’에 비유할 수 있는 일련의 액션을 지속하면서 실질적인 협상 내용은 진전시키지 않는 태도를 유지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은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있다고 기회가 될 때마다 강조한 게 이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한다.

실제 2차 북미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고위급 회담은 불분명한 이유로 무산되었는데 이에 대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해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 측이 베이징에서 미국행 비행기 예약과 취소를 수차례 반복했다는 점을 들어 북한이 합의 성사를 위한 미국의 ‘시그널’을 기대했으나 받지 못한 게 회담 연기 통보의 실질적 이유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여기서 미국의 ‘시그널’이란 종전선언이나 제재해제에 대한 것이다. 즉, 군사적 경제적 양쪽 모두에서 미국의 입장 변화가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이런 기류는 문재인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이 15일 면담한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내년 2차정상회담 가능성을 재확인하고 우리 정부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대북매파의 전형적 현실 인식을 드러냈다. 지난 수십년 간 북한의 약속만 믿고 제재를 풀거나 경제적 지원을 해줬으나 결국 합의가 깨지더라는 거다. 따라서 이번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이는 북한이 ‘제재 해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온 사실을 흘러간 노래를 다시 반복하는 제스츄어로 보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미국이 대북정책을 다루면서 최근 쓰지 않던 표현인 ‘CVID’가 다시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 중인 문재인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이 15일 오전(현지시간) 싱가포르 선텍(Suntec) 컨벤션 센터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북한 내 미사일 기지 활동에 대한 보고서를 공개하고 이를 뉴욕타임스가 과장된 톤으로 대서특필해 논란이 커진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국내 언론은 해당 보고서가 이미 한미 정보당국이 파악하고 있는 내용을 이번에 새롭게 파악된 것처럼 표현했고 이를 뉴욕타임스가 ‘속임수’로 규정하는 등의 왜곡을 지적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뉴욕타임스의 과장 보도는 ‘반 트럼프’ 노선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뉴욕타임스 보도가 아니라 CSIS가 이러한 보고서를 작성한 의도 자체에 있다.

이 보고서에 대한 빅터 차 CSIS 한국석좌의 주장을 보면 의도가 분명해진다. CSIS의 보고서는 북한 내에 이런 저런 탄도미사일 기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환기하는 것 이상의 내용을 담지 않고 있는데, 빅터 차 등의 주장은 향후 비핵화 협상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뿐만이 아니라 괌 미군기지나 주일미군을 타격할 수 있는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문제까지 의제로 다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주장은 그동안 일본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제기해오던 것이다. CSIS는 공화당 주류 성향의 민간싱크탱크로 미일동맹 강화를 통한 동아시아 개입 전략을 강조하는 주장을 개진해왔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향후 검증 대상에 중장거리 탄도미사일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북미간 양자 협상 구도를 다자 구도로 전환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는 셈이다. 이럴 경우 북미대화를 통한 협상 타결의 가능성은 좀 더 좁아진다.

따라서 아예 다자 구도를 전제하고 문제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의 정세현 전 장관은 15일 더불어민주당 소속 기구들이 연 강연에서 미국이 과거 ‘리비아식 모델’로도 불렸던 검증원리주의적 태도로 돌아갔다는 취지의 진단을 내놨다. 만일 그렇다면 북미협상은 아예 무산되거나 합의가 된다 하더라도 비핵화를 달성하지 못한 형태로 봉합될 수 있는데, 어떤 경우든 문재인 정권 입장에선 심대한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다.

따라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시급히 추진해 미국이 요구하는 조치의 일부를 먼저 이행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하고 이 결과에 대한 북한의 우려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비핵화 촉진 및 감시 등 평화체제 구축 및 유지의 역할을 맡는 일종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걸로 해소해야 한다는 것을 정세현 전 장관 주장의 핵심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선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도 지난 11일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주장한 바 있다.

이런 해결책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할지, 기대한 효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를 전망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 자체가 앞으로 북미대화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보수세력이 오매불망하는 대로 올해의 괄목할만한 진전을 헛수고로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우려와 달리 일시적 국면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때일수록 애초의 목적의식을 되새겨볼 필요도 있다. 지금까지 이 정부의 대북정책 담론은 협상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무언가 합의를 만들어 내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면 이해관계자들이 이런 저런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다소 기술적 측면에 맞춰져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북미대화의 중재자를 자임하겠다는 전제 조건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이를 넘어 반전과 평화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다수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활동들에 더 큰 의미를 실을 필요가 있다. 비핵화는 각국의 이해관계 관철 수단이 아니라 전쟁으로 가는 길을 차단해야 한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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