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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캐리어', 광안리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의 기이한 하룻밤[미디어비평] 너돌양의 세상전망대
너돌양 | 승인 2018.11.13 14:29

회색 가발을 쓴 한 여자(김다인 분)가 파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선다. 같은 시각 흡사 조커를 떠올리게 하는 가발을 쓴 남자(박종환 분)가 검은색 캐리어를 끌고 광안리 해변을 배회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오프닝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영화 <해변의 캐리어>(2017)는 지난해 열린 제19회 부산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이매진>(2011), <달을 쏘다>(2013), <파란입이 달린 얼굴>(2015)을 연출한 김수정 감독의 중편독립영화다. 

<해변의 캐리어>를 연출한 김수정 감독은 부산에서 활동하는 여성 감독으로, 그녀가 만든 세 번째 장편영화 <파란입이 달린 얼굴>가 제41회 서울독립영화제 우수작품상, 제17회 장애인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무능력한 엄마와 지적장애가 있는 오빠를 부양하며 악착같이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파란입이 달린 얼굴>은 제목만큼이나 괴이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영화다. 남들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받든 말든 오직 생존만 생각하는 여성을 불편하고도 그로테스크한 시선으로 바라본 <파란입이 달린 얼굴>과 달리, 광안리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해변의 캐리어>는 한결 부드러워진 재미를 선사한다. 

2017년 제19회 부산독립영화제 개막작 <해변의 캐리어> 스틸이미지

광안리 해변을 주무대로 담은 <해변의 캐리어>는 흡사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다. 캐리어를 끌고 광안리 해변을 배회하다가 그녀의 공연을 좋아한다는 팬을 우연히 만나게 된 여성은 꽤 오랜 기간 광안리 해변에서 퍼포먼스 공연을 해왔던 예술가로 추측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더 이상 공연을 하지 않는 여성은 광안리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반면, 광안리를 떠난 지 30년 만에 다시 광안리를 찾은 남자는 너무나도 달라진 광안리 해변 풍경에 낯설어 한다. 바다가 보이는 집과 직장을 원하는 남자는 광안리 근처 부동산, 식당 등을 돌며 자신이 원하는 조건의 집과 일터를 찾아다니지만 그의 독특한 외향과 화법 때문에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회색 가발을 쓴 여자와 타인에게 위협감을 안겨주는 차림의 남자. 생김새만 봐도 사회부적응자를 암시하는 이들 남녀는 해변에서 처음으로 우연히 마주치고, 여자가 일하는 가라오케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해변에서 곧 부산을 떠날 것이라는 여자의 전화통화를 엿들은 남자는 가라오케 주인에게 이 여자는 곧 여기를 떠날 것이니, 여자를 자르고 자신을 새 알바생으로 써달라고 생떼를 쓴다. 직언을 잘하는 성격 탓에 다니던 직장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아픔이 있다는 남자는 말을 돌려서 하는 법이 없다. 여자 또한 대인관계가 썩 원만해 보이는 편은 아니다. 공연을 하고 싶어 아무런 연고가 없는 부산까지 내려온 여자는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이고, 분노조절도 쉽지 않아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전 알바생과 새 알바생으로 가라오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두 남녀는 금세 친해져 많은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길게 지속되지는 못하고 뚝뚝 끊겨버린다. 이들 사이에 오고가는 말은 대화라기보단, 자기들 하고 싶은 말만 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러나 비록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각자의 삶에 대한 내밀한 고백이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 어떤 영화 속 대사들보다 밀도 있고 흥미롭게 펼쳐진다. 

어느새 각자 머리 위에 씌워져 있던 가발을 벗어 던진 이들은 서로의 캐리어 속 물건들을 꺼내 보기도 하고, 괴이한 퍼포먼스를 함께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그리 얼마 지속되지 못한다. 그래도 남자는 여자와 조금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눈치지만, 여자는 캐리어를 끌고 제 갈 길을 가려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변의 캐리어>는 상당히 연극적이다. 두 인물을 조명하는 카메라 구도와 배우들의 연기톤도 연극적으로 느껴지지만, 영화 자체가 우리의 인생에 관한 한 편의 짧은 연극을 보는 것 같다. 

극 초반 자신의 공연을 좋아한다는 여성팬을 만나게 된 여성은 해변에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것 또한 공연이냐는 팬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그리고 여성의 공연을 다시 보게 되어 너무 기쁜 그녀의 팬은 여성이 해변에서 지인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화를 내는 것 또한 공연의 일종인 줄 알고 그녀에게 자신의 카메라를 들이댄다. 삶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는 불분명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저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할 뿐. 남녀가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보낸다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을 한 편의 흥미로운 연극적 영화로 승화시킨 김수정 감독의 차기작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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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돌양  knud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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