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아이파크의 황선홍 감독은 한국 축구사에 상당한 족적을 남긴 축구인이지만 그만큼 부침과 좌절도 많이 겪었던 영웅이었습니다. 온갖 부상, 부진 등으로 좌절을 겪었고 그럴 때마다 축구팬들로부터 상당한 비난을 받아야 했던 그였습니다. 하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새로운 신화를 쓰는 첫 축포를 터트리며 화려하게 비상했고, 최고의 순간에서 은퇴를 선언하며 지도자 무대에 뛰어들었습니다.

대표팀 지도자로 방향을 튼 '절친' 홍명보 감독과 다르게 클럽 축구 쪽으로 지도자 생활 첫 번째 둥지를 튼 황 감독은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변변한 스타 플레이어 한 명 없이 시작해 몇몇 무명 선수들을 국가대표급 선수로 키워 실제로 배출시켰을 만큼 황선홍 감독의 지도력은 '알게 모르게' 눈에 띄는 면이 많았습니다. 정성훈, 김창수, 이승현, 박희도 등이 그의 손을 거쳐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고, 무엇보다 선수들이 똘똘 뭉쳐 어떤 상대를 만나든 크게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황선홍식 투혼 축구'는 K-리그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진일보한 모습을 보이며 지난해 컵대회 준우승을 차지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황 감독은 감독 3년차인 올해 한국 축구 최고 클럽을 가리는 FA컵 결승에 마침내 진출했습니다. 드디어 황 감독도 지난해 U-20(20세 이하) 월드컵 8강에 오른 홍명보 감독에 이어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이번 승리로 컵대회에 이어 두 번째로 우승이라는 성과에 도전하는 황선홍 감독은 4강 경기를 마친 뒤 '파격적인 행동'으로 팬들로부터 엄청난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바로 팬들과 약속을 했던 세레모니를 아주 '시원하게' 이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황선홍 감독에게 많은 팬들은 다시 주목하고 있고, 결승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 FA컵 결승 진출 기념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펼친 황선홍 감독 (사진 위, 오른쪽에서 두번째, 부산 아이파크 제공)
이번 FA컵 준결승전 경기 자체가 올해 열린 축구 경기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다고 여겨졌을 만큼 정말 치열하고 재미있었던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유독 주목받은 것은 바로 황선홍 감독이 '승리 세레모니'를 어떻게 보여줄지 기대가 됐기 때문입니다. 이번 경기를 앞두고 팬들의 공모를 받은 황 감독과 부산 구단은 1998년 4월, 한일 정기전에서 가위차기 골을 넣은 뒤 펼친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승리 세레모니로 확정하고 경기에서 이겼을 때 이 세레모니를 펼치기로 했습니다. 결국 연장 접전 끝에 3-2 승리를 거둔 뒤 황선홍 감독은 선수들과 함께 자신의 '영원한 백넘버'인 18번 유니폼을 입고 팬들 앞에서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펼쳐 상당한 환호를 받았습니다. 부산 팬들에게는 정말 잊지 못할 감동을, 그 밖에 다른 축구팬들에게는 옛 향수를 자극하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황선홍이라는 축구인은 여러 선수, 감독들 가운데서도 가장 팬들에 의해 축구 인생이 좌우됐던 사람이었습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부진 때는 팬들의 엄청난 비난 포화를 받으면서 나락으로 떨어질 뻔 했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을 때는 다시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보면 롤러코스터같이 자신을 '다룬' 팬들이 미울 수도 있을 것이고, 답답한 마음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은퇴 이후에 팬들과 활발한 소통을 하면서 한국 축구의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선수 시절 자신을 응원한 팬들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다방면에서 소통하는 것이 후배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일월드컵 때는 축구 해설이라는 어려운 도전도 말끔하게 수행했고, 최진철, 유상철, 김태영 등과 함께 남아공월드컵에서는 TV 광고로 팬들에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몸을 던지는 '슬라이딩 세레모니'로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펼친 뒤에도 황선홍 감독은 결승전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 뒤 팬들과 더 가까이 하는 세레모니를 펼치겠다고 밝혀 벌써부터 어떤 세레모니가 나올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보고, 어떻게 보면 황 감독이 참 팬관리를 잘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을 응원해온 팬들을 위해 언제라도 몸을 던질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다른 축구인들에게도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슬라이딩 세레모니는 참 유쾌하고 재미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황 감독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 따뜻하고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세레모니였습니다.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어 밋밋하다는 지적을 받은 FA컵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는 점도 이번 황 감독의 세레모니는 참 의미가 있었습니다.

올해로 황선홍 감독은 부산과의 계약이 만료된다고 합니다. 재계약도 노리고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번 FA컵 결승전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질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황 감독은 어린 선수들이 많은 팀의 특성과 차세대 한국 축구를 이끌어 갈 젊은 지도자가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조용한 혁명'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리고 '한국 축구의 영웅'답게 팬들과 비교적 적극적이면서도 독특한 소통을 보여주며 팬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떤 결과를 내든 황선홍 감독, 아니 축구인 황선홍이 지금까지 보여준 그 모습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황선홍표 축구'가 1990년대 화려했던 부산 축구의 부활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한국 축구에 널리 퍼지는 그 날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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