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이하(U-17) 여자월드컵에서 사상 첫 우승을 일궈낸 U-17 여자축구대표팀이 어제 공식 해단식을 가졌습니다. 다른 대표팀 해단식과는 다르게 대단히 파격적이고 재미있는 장면들이 잇달아 나와 눈길을 끌었는데요. 선수들이 최덕주 감독의 애창곡을 부르는가 하면 직접 춤을 추고, 노래도 불러 '우승 자축연'을 하는 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습니다. 어쨌든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 우리 어린 태극 소녀들은 또 다른 신화 같은 미래를 기대하며 공식 해단했습니다.

하지만 이 22명의 선수 가운데서 모든 선수가 대표 선수 생활을 이어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까딱 한 번 부상이라도 당해 이렇다 할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비좁은' 대학 나아가 실업팀 문을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실력을 자랑하고도 어떻게 보면 가장 민감한 이 시기에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지금 보여준 성과가 묻힐 수 있다는 '역설'이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여자 축구의 현실입니다.

▲ 2009 WK-리그' 챔피언결정전ⓒ연합뉴스
이번 여자 대표팀은 등록 선수 16개팀 345명 가운데 뽑은 멤버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수천명, 수만명의 등록 선수를 보유해 풍부한 인적 자원을 갖춘 것에 비하면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수준입니다. '엘리트 스포츠 육성'의 특성을 살려 기량 좋은 선수들을 어린 시절부터 잘 키워내 좋은 성적을 내기는 했지만 이 선수들이 국내에서 여느 청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면서 축구 선수를 하기에는 아직 환경이 대단히 열악하고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우선 팀이 너무나도 적습니다. 현재 여자 축구는 초등학교 18개팀, 중학교 17개팀, 고등학교 16개팀, 대학교 6개팀, 실업팀 7개팀, 유소년 클럽팀 1개팀으로 거의 1개 도에 1-2개팀씩 있는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16개팀에 있는 선수들 가운데 갈 수 있는 팀이 대학, 실업 모두 합해 봐야 13개 팀에 불과해 다수의 여자 축구 선수들은 초,중,고 시절 꿈을 키워온 축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뜩이나 팀이 적은데 오히려 팀이 점점 줄고 있고 심지어 초등학교 팀마저 줄어들어 풀뿌리마저 뽑히는 것 아닐지 걱정되는 수준에 이르고 있습니다.

적은 팀만큼이나 환경도 초라합니다. 컨테이너 박스 같은 데에 합숙소를 잡고 비좁은 공간에서 샤워나 휴식을 하던 선수들이 이런 쾌거를 이뤄낸 것을 보면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아무래도 우리 사회가 여자들이 스포츠를 하는 것에 대한 인식, 특히 축구를 하는 것에 대해 크게 인색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변이 약한데다 '남성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있는 축구를 여성들이 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크게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팀 숫자가 적어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측면도 여자 축구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중학교 여학생 축구 선수를 딸로 둔 한 학부모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죽어라고 하지 말라고 해도 축구가 좋아서 결국 시키게 됐다는 이 학부모는 "딸아이의 꿈을 짓밟기 싫어서 지금은 이렇게 시키지만 나중에 고등학교, 대학교 가서 꿈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생기는 좌절감이 어떨까 싶다"면서 축구를 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하기보다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여자월드컵 우승을 일군 선수들 학부모 가운데서도 처음에 축구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던 분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걸 보면 잠재적인 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잠재력 있는 어린 선수들'이 많음에도 이들을 끌어들일 만한 환경적인 요소가 뒷받침되지 않아 쉽게 포기한 경우가 많을 수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 U-17 여자월드컵대표 선수들이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그룹 샤이니의 축하공연을 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20세 이하 여자팀에 이어 17세 이하도 정말 좋은 성적을 낸 만큼 이젠 축구계가 남자뿐 아니라 여자 축구에도 눈을 돌려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소수 엘리트들을 통해 기본적인 밑바탕을 까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는 제2의 지소연, 여민지가 정말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저변을 확대하고 보다 많은 팀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둬 세계적인 실력에 걸맞는 환경을 갖추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각 기업들의 돈지갑을 푸는 것도 있을 수 있고, 현 여자 축구의 시스템을 남자 축구에서 실행중인 '공부하며 축구하는 선수 키우기'에 맞춰 보다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활약했던 태극 소녀들도 마음 놓고 운동해서 대표 선수의 꿈을 이어나가고, 그 아래에 있는 선수들도 더 좋은 여건에서 축구를 해서 궁극적으로 진정한 '여자 축구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U-17 여자대표팀을 격려한 오찬 자리에서 "잘 할 때 반짝 관심만 가지지 말고 꾸준히 관심을 가져가지고 앞으로 더 좋은 성적을 내는 데 정부도 좀 이럴 때 관심을 가지는 게 좋겠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게 좋다."라면서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무 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가 "방안을 찾겠다"고 이야기했을 뿐 아직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내용은 U-20 여자월드컵 3위 이후 두 달이 지나도록 아직 나온 것이 없습니다. 현재의 우승, 그리고 U-20 팀의 3위라는 쾌거는 분명히 값지지만 여기에만 심하게 도취돼선 절대 안 됩니다. 여자 축구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것이 세계 축구계의 '블루 오션'이라고 두 차례나 연속 확인한 만큼 정부나 축구협회를 비롯한 축구계, 그리고 기업들이 머리를 맞대고 진정으로 여자 축구가 발전을 이루고 세계적인 실력으로 더욱 급부상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논의 과정에서 밥그릇 싸움만 할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선수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진일보한 무언가가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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