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현재로서는 권력의 중심이다. 그 중에서도 중심인 기획조정분과위는 국정목표를 수립하고, 국정과제과 국정로드맵을 총괄 조정하는 신정권의 핵심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권력의 코어에 미디어․방송통신융합 문제를 다룰 ‘방통TF’, 보다 정확히 ‘방송통신미디어정책팀’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보통 의미심장한 일이 아니다. 미디어 문제가 차기 정권의 우선적 정책과제로 자리 잡았음을 정확하게 말해준다. 일부 교수가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권력이 기존 미디어 정책의 변화 주도권을 틀어쥐고 강력히 규제완화 조치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셈이다. 인수위의 행보를 더욱 예의주시하게 되는 까닭이다.

▲ 중앙일보 2008년 1월9일자 1면.
인수위는 미디어, 언론 문제에 대해 이미 분명한 철학, 확실한 이념을 드러냈다. “정부에 의해서 언론이 통제되거나 국민의 알 권리가 제한 받아서는 결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취재선진화방안’ 무효화를 선언했다. “이제 관제 홍보시대는 끝났다.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민간의 창의와 협조 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홍보가 구현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국정 홍보처 폐지의 이유였다. ‘언론자유’를 향한 권력의 의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언론의 자율성과 공정성을 확인하고 미디어산업에 활력을 불어 넣겠”다고 다짐했다. 그러하기 위해 신문법을 폐지하고 신문 방송 교차소유를 풀겠다는 것이 가장 최근에 듣는 인수위의 주장이다.

언론과 언론자유를 위해 최대한 규제를 풀겠다는 셈이다. “이명박 정부는 언론의 자유가 꽃 피는 시대를 만들 것”이라는 인수위 부위원장의 발언이 이를 압축 정리하고 있다. 얼마나 듣기에 좋은 말인가? 단어 그 자체만 보면 새 정권이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 진정한 언론해방을 가져다 줄 것 같다. 신자유주의 자본국가 만만세다. 수구매체가 내놓는 이야기를 봐도 그렇다.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중앙일보>가 이들의 시각을 대변한다. “언론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주춧돌이라는 인식을 기반으로 정부의 간섭을 대폭 배제하는 쪽”으로 새로운 신문법의 기조가 잡혀야 할 것이라고 제언한다. 신문과 방송의 겸용 허용에서 나아가, ‘신문, 방송, 통신, 인터넷의 융합’을 허락해 달라고 청구한다.

‘비판언론’을 억압한 노 정권을 규탄하면서, 언론자유를 위축시키는 언론중재법을 ‘개선’해야 한다는 게 조선일보의 제안이다. 요란한 언론자유의 말잔치에 동아일보가 빠질 리 만무하다. 유일상 교수의 기고는 “인간의 기본권인 언론 자유”라는 절대 당위적 테제로 시작된다. 그런 자유를 해친 ‘희대의 악법’을 박물관에 보내는 게 “시민사회의 보편적 담론”에 화답하는 것이라고 주장이다. 현실의 왜곡은 차치하고, 담론의 과장이 심하다. 참고 좀 더 읽어보자. “신문법 폐지는 언론출판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재확인시켜 준 결단이다. 좀 더 기대한다면, 언론자유를 과도하게 간섭하는 언론중재법도 개폐하고, 많은 국민이 싼값으로 방송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방송 사업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 동아일보 2008년 1월9일자 35면.
한나라당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언론 탄압의 일등공신”인 국정홍보처장이 어찌 대학으로 돌아가 학생들에게 언론자유를 가르칠 수 있겠냐고 비아냥댄다. 좋다. 언론의 귀중함과 언론자유의 고귀함에 백번 동의한다. 그런데 대체 언론은 무엇이고 언론자유란 과연 무엇인지, 개념정리부터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인간의 기본권인 언론 자유’이라는 유 교수의 정리에 찬동한다. 맞다. 언론은 인권이다. 그리고 사회적 권리, 커뮤니케이션권이다. 언론학 개론서까지 갈 것 없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보라. “개인이 말이나 글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는 일, 또는 그 말이나 글”이라고 되어 있다. “매체를 통하여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이라고 적혀있다.

요컨대 인민이 의사를 드러내 타자와 교통하고, 그럼으로써 차이를 확인하고 필요하다면 공통된 견해로 모아보는 그런 개인적이자 동시에 사회적인 실천이 바로 언론인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고, 자유언론을 왜 민주주의의 기본조건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가 명백해진다. 언론 자유, 커뮤니케이션의 민주적 권리를 옹호한 마르크스를 대면 또 뭐라 시비할지 모르니, 칸트의 정언을 옮겨 보겠다. “인간에게서 자신의 생각을 공적으로 소통할 자유를 박탈하는 외부 권력에 대해 생각하는 자유 또한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일보가 들먹이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라는 게 바로 이 시민적 권리를 보장하고 민주적 공화주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근대적 기획임을 아는가?

따라서 차이를 존중하고 발언을 인정하는 민주적 예의, 즉 시빌리테 없이 언론, 언론 자유를 떠드는 것은 숭고한 개념에 대한 모독이다. 타자의 윤리학, 사회보호의 신념,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에 대한 깊은 철학 없는 언론과 언론자유의 거명은 말장난이고 이데올로기이며, 선전술에 불과하다. 어떻게 언론이 곧 조중동이자 KBS가 되고, 어떻게 언론자유가 미디어기업의 상업적 자유로 통할 수 있는가? 어떻게 언론 자유가 독점 거대 미디어 기업들이 사회적 규제, 합리적 통제 없이 덩치 키우고 장사할 수 있는 특권으로 전락했는가? 언론은 그렇게 희화화될 수 없고 물화될 수 없다. 인간과 소외된 언론, 사회와 유리된 언론자유는 민주주의의 적이고 열린사회의 암적 존재일 뿐이다.

▲ 조선일보 2008년 1월10일자 4면.
‘언론자유’를 남발하는 이들에게 책 선물을 하고 싶다. 한겨레에 밝힌, 올해 해보고 싶은 일을 실천한다. 우선 푸코의 <Fearless Speech>라는 작은 책이다. 번역되지 않은 상태라 기꺼이 요약해 드리겠다. 계보학의 대가답게 그는 ‘언론자유’라는 단어의 서구적 기원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리스 낱말 ‘파르헤시아(parrhesia)’를 발굴해낸다. 다름 아닌 ‘두려움 없는 발언’, 푸코는 바로 이 파르헤시아가 언론자유 개념의 뿌리임을 밝힌다. 솔직함(frankness)과 진실(truth), 위험(danger), 비판(criticism), 그리고 의무(duty)의 다섯 가지가 단어를 구성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진실을 이야기하며, 그럼으로써 권력을 비판하는 시민적 의무가 다름 아닌 언론 자유의 참 뜻이라는 것이다.

루소는 또 어떠한가? <고독한 산택자의 몽상>에서 그는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언제나 진실을 말하자”라고 다짐한다. “진실에 반하여 어떤 식으로든 정의를 해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고 충고했다. 진실의 발언을 위해/통해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자본권력, 이데올로기 권력,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자신의 매체권력까지 시비할 수 있다면, 조중동이든 누구든 당당하게 언론자유를 말할 자격이 있다. 거대매체뿐만 아닌 일반 시민까지도 자유롭게 발언하고 공개적으로 회집하며 진실된 여론을 수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때서야 인수위도 언론자유를 충분히 앞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매체권력을 더욱 키워줄 것이라면, ‘언론’과 ‘언론자유’의 헛배부른 말 성찬은 사양이다.

언론의 인권, 언론자유의 사회적 윤리에 기초해 ‘언론자유’의 선전을 고발한다. 정치권력과 매체자본의 공적공간 폐쇄 기도에 맞서는, 말 그대로의 ‘시민사회의 보편적 담론’ 발동이다. 명백한 지적 사기와 노골적 선전 공세를 폭로하고, 왜곡된 상식에 정리된 공통지식으로 맞설 것을 제안한다. 관습의 오류를 걷어내면 진실 목격이 가능해지는 법. 정확하게 개념을 정리하고, 예리한 통찰의 무기로서 깊어가는 신자유주의 자본국가의 긴 계곡을 지나야 할 것이다. ‘언론’과 ‘언론자유’의 두려움 없는 선전에 참 언론과 진실한 언론 자유의 용기로 맞서는 것 외에, 민주주의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 줄 수단이나 방법은 없다. 그들이 전유하면, 우리는 재전유해내야 한다. 저 쪽의 말이 많으니, 괜히 내 글도 따라서 길어졌다.

지금처럼 ‘비평의 무기’를 예리하게 연마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까? 벼락같은 이성의 도끼질, 결을 거스른 감수성의 대패질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다. ‘래디컬’한 저널리스트로의 변신. 자본권력과 국가권력, 매체권력, 지식권력이 나의 상대다. 가끔 참패당하고 때로는 붙잡고 버티지만, 그래도 결정적인 왼손펀치 한방을 가진 선수로 남고 싶다. 인민은 착하고 또 무섭다. 이들과 함께하는 비평 말고 그 어떤 것이 후기근대, 후기자본의 불모지대를 넘어갈 수 있겠나? 목청 낮춘 채 예의주시하는 보통사람들의 삶, 이들의 언어에 스며들어 비평의 유격전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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