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보편적 복지의 시대가 열리는 것일까?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지난 2일 기자회견을 열고 아동수당을 소득과 관계없이 지급하도록 하고 3년 안에 초등학교 6학년까지로의 지급 대상 확대와 월 30만원 수준으로의 액수 상향을 언급한 이후 다시 ‘보편적 복지’의 이름이 언론을 통해 오르내리는 걸 보니 복잡한 기분이 든다.

실제로 자유한국당 일부 인사들은 언론을 통해 그동안의 ‘선별적 복지론’에서 경우에 따라 후퇴할 수 있다는 언급을 하는 중이다. 보수도 못 되는 수구이므로 진정한 보수가 되어야 한다는, 즉 “먼저 인간이 되어라”류의 평을 듣는 경우가 많은 자유한국당이 갑자기 보편적 복지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자유한국당이 태도를 바꾼 첫 번째 이유는 역시 돈 문제일 것이다. 아동수당을 애초 정부안대로 일괄적으로 지급할 경우 추가로 들어가는 예산과 현행대로 할 때 지급 대상을 선별하기 위해 소요되는 행정비용을 산술적으로 비교하면 후자가 더 크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지적돼왔다. 따라서 특정 연령대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 일괄적으로 아동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누가 봐도 합리적이다.

두 번째 이유는 주류 경제정책에 충실한 인물들도 지금의 저출산 풍조를 위기로 진단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막대한 비용을 쓰고도 효과를 못 본 저출산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언론 지면에 등장한 바 있다. 저출산의 이유 중 하나는 육아 비용 부담이 크다는 것인데 아동수당은 이를 경감해줄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다. 따라서 자유한국당이 이 문제를 선심성 예산 등 포퓰리즘의 문제로 매도하기가 쉽지 않다.

세 번째 이유는 ‘득표 전략’이다. 자유한국당은 밖으로는 예산국회와 정계개편에 대응해야 하고 안으로는 원내대표 선거와 전당대회를 치러야 하는 이중적 상황에 처해있다. 정치권의 선거공학으로 볼 때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여성층은 정책적 민감도가 가장 높은 집단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 여러 이유로 육아 문제에 둔감하므로 아동수당 지급이라는 정책은 이 계층에 어필한다. 보수정치의 부활에 대한 다양한 주장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바는 청년과 여성층에서의 지지율 만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조치는 철회되거나 번복되어야 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 계층이 경쟁자들에게 실망할 만한 거리가 있다면 침소봉대를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릴 일이 아니다. 최근 보수세력이 전심전력을 다해 이슈화시킨 공공기관 채용비리 문제가 대표적이다. 보수언론들은 ‘기득권’인 노조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청년들의 미래 일자리를 빼앗아갔다며 자유한국당과의 노골적인 ‘세트플레이’에 나섰다. 얼마 전 새로운 ‘젊은 보수’들로 소개됐던 단체나 그 비슷한 인물들이 대자보나 인용 등으로 등장해 비탄의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왼쪽 세번째)가 2일 오후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2019 예산안과 관련한 기자회견에 앞서 취재진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지면에서도 수차례 지적했듯 보수세력의 이런 과감한 행보는 현 정권과 정책적인 각을 세우고 자기들 내부의 일을 해결하려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었다고 본다. 예산낭비를 막고,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 성장의 원동력을 확보하면서, 노동자의 처우개선보다는 불안정노동의 유지 또는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유한국당의 정치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자는 것 이상의 의미가 아니다.

자유한국당의 이런 정치는 보편적 복지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얘길 하기 위해서는 먼저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대립이라는 도식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 도식은 복지제도의 혜택을 주는 방식에 따른 구분이다. 어떤 복지제도가 소득 등 다른 조건을 두지 않고 대상에게 일률적으로 지급하는 형태를 따르고 있다면 보편적 복지이고 무언가 조건부로 지급하는 방식이면 선별적 복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보편적 복지론이 힘을 받게 된 맥락을 함께 고려해서 봐야 할 필요도 있다. 보편적 복지론은 2010년을 전후한 선거들에서 무상급식 등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면서 폭발력을 갖게 됐다. 이 당시 논쟁은 국민의 행복한 삶을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보장해줄 것인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됐다. 이명박 정권이 “부자되세요”로 대표되는 시장원리에 의한 각자도생을 추구하였다면, 이에 맞서는 어떤 진보적인 정치는 국가에 더 많은 책임을 지우고 요구하는 것으로 구성원들의 삶을 보장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이를 통해 도출되는 결론은 복지를 당연한 권리로서 요구하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보편적 복지는 철학의 문제이지 지급 방식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소득 구분별로 일부 계층에만 지급하던 아동수당을 모든 계층에 지급하는 것의 배경을 따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동수당 지급 의의를 생산가능 인구를 늘리자는 쪽에 있다고 답한다면, 권리의 보장이 아니라 ‘효율’을 우선하는 정치로 볼 수 있다. ‘효율’을 중시하는 정치는 약자의 소외를 당연시한다. 이런 관점에서의 복지는 약자가 완전히 파멸하는 것을 막고 생산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생산적’인 것에 그치게 된다.

반면 육아를 개인의 능력에 맡기는 게 아닌, 공동체적 문제 해결 방식으로서의 아동수당을 사고한다면 이는 ‘연대’의 정치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권리로서의 복지를 요구하는 보편주의는 다수의 시민을 공통된 이해관계로 묶는 수단으로 기능하기에 중요하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요구는 이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정치세력의 복지제도에 대한 태도 변화를 판단할 때에는 단지 지급 방식에 대한 것을 넘어 전체적 맥락을 봐야 한다. 약자의 희생을 당연시하며 쪼개고 나누는 수단으로서의 복지인가, 아니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공동의 요구를 관철하도록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복지인가를 따져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자유한국당은 여전히 전자에 머물러있다는 점에서 근본적 태도를 바꿨다고 볼 수는 없다.

여기서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마찬가지 기준을 들이댈 때 정부 여당이 갖고 있는 복지제도에 관한 철학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때에는 분명 모두가 입을 모아 보편적 복지를 외쳤지만, 지난 대선을 경유하면서 이런 목소리는 사그라들고 생산적 복지와 사회투자국가식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가 버린 것은 아닌가? 국가 운영의 어떤 책임과 정치적 이유 등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진보정치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 보편적 복지 실현을 위한 국가적 밑그림을 더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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