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저 여느 모녀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모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자 동시에 모녀가 살아왔던 세상의 이야기이고, 활동가였던 모녀가 GMO에 대항하여 싸워왔던 투쟁의 기록이다.

GMO 세상, 그 기록의 시작

그 시작은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모습을 담은 홈비디오에서 시작된다. 엄마의 정원을 위태로운 걸음으로 누비는 아기, 갓 수확한 콩깍지의 콩 맛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유독 먹을 것을 좋아하던 아기는 그렇게 '식료품점'이라는 뒤뜰 정원에서 엄마가 기른 맛난 재료들로 만든 풍성한 음식들을 먹으며 자라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음식을 좋아하고, 그래서 만들기를 좋아하던 아이는 음식을 만드는 블로그를 꾸리고 그 영상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재료가 문제였다. 엄마는 수천 년 동안 우리의 농부들이 그래왔듯이 뒤뜰 정원에서 한 해 동안 키워낸 농산물의 씨앗을 저장하여 다음 해 농사를 지어왔다. 하지만 도시로 나온 딸이 만난 재료들은 어머니가 키웠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에게로 왔다. 그 수상한 식재료의 의문이 어머니가 보내주신 GMO 관련 서적에서 풀려나갔다.

1956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사회 정의에 앞장섰으며 환경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딸이 태어난 이후에는 유기농 농사일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의 레이더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었다. 그리고 그 열려진 레이더에서 발사한 날카로운 비판의 전파는 고스란히 딸에게 전달되었고, 그 어머니의 그 딸은 그걸 기록했다.

1996년 캐나다에 처음으로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 변형 생물)가 도입되었을 때부터 어머니는 반대했다. 그 이유는 뒤뜰에서 수확한 씨앗과 달리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이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GMO, 유전자 조작의 책임질 수 없는 결과

제4회 서울국제음식영화제 상영작 <조작된 밥상> 포스터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딸인 오브 지로 감독은 우선 GMO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전문가 들을 찾아 나선다. 대표적인 GMO 농산물에는 옥수수, 콩 등 가공식품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식물군들이다. 이들은 제초제에 내성이 있거나, 살충 물질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유전자를 변형시킨다. 즉 결국은 유전자를 변형한 이들 식물들로 인해 농사는 보다 용이해지고, 각종 병해로부터 안전해지고, 많은 수확량을 낼 수 있다는 것이 GMO 농산물을 확산시키는 쪽의 입장이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건 바로 GMO의 다면발현성 효과이다. 즉 우리의 과학 기술은 아직 GMO가 만들어낼 수도 있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에 대해 정확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실험실에서야 콩에 돼지 유전자를 결합하든 어떻게 하든 얼마든지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그걸 먹이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반대자들은 주장한다. 이런 무리한 유전자의 변형이 심각하게는 우리 인간 생명체 고유의 유전적 특징을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장기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결국은 발암 물질로 판명된 글리포세이트처럼.

따라서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낼 이 GMO에 대해 소비자들의 주장은 기본적이다. 자신들에게 GMO에 대한 선택권을 달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공식품의 재료가 되는 GMO. 자신들이 사는 물건들에 GMO가 들어있는지 알고 선택할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GMO를 도입한 정부 등은 그런 '알 권리'가 대중 사이에 외려 있지도 않은 공포를 조성한다며 GMO 사용 여부 공개를 반대해왔다.

GMO와 관련된 국제기구의 53개 권고사항조차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은 미국과 캐나다가 GMO 표시제에 대해 완고한 반대의 입장을 고수한 반면, 2000년대 광우병 사태를 겪은 유럽은 그 여파로 분위기가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발바리안 농부들의 시위를 기점으로 GMO 표시제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를 확산해 갔으며 그건 딸의 영상에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는다.

11살의 나이로 '아이들의 알권리'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이 먹는 음식에 알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 운동을 벌인 미국 소녀 레이첼이 어른이 될 때까지의 활동도 담겼다. 모유에서 검출된 글리포세이트(제초제의 한 종류)에 분노하여 EPA(미국 환경 보호청) 앞에서 시위하는 1만 명의 엄마들도 취재했다. 오브 지로 감독의 <조작된 밥상>은 캐나다와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 벌어진 GMO 반대 운동의 10년을 꾸준히 담아낸다.

오브 지로 감독의 어머니처럼 해마다 자신이 기른 농산물 중에 씨앗을 저장하여 다음 해 농사를 짓던 농가들은 다국적 종자 기업과 그에 기반한 정책에 의거, GMO 씨앗을 '기술 사용 동의서' 등을 빌미 삼아 기르도록 강제된다. 이런 압박에 버티며 전래의 품종을 고수하려는 소규모 농가는 점점 발을 붙이기 힘들게 된다. 결국 수 마일에 걸친 옥수수밭으로 상징되는 농촌 사회의 붕괴, 생물 다양성의 파괴만이 오늘날 대부분의 농촌의 모습이다.

오브 지로 감독이 찾아 나선 양봉 농가. 놀라운 것은 GMO 종자를 이용해 농사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키우던 벌이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수집한 꿀에서 GMO 성분이 발견된 것. 즉 유기농 농사를 짓는다 해도 주변 농장에서 GMO 작물을 키운다면 얼마든지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벌의 활동을 통해 보여준다. 이런 오브 감독의 추측은 뜻밖에도 감독의 어머니에게서 '비극적' 결과로 도출된다.

평생 유기농 정원을 꾸려 그곳에서 난 건강한 식단만을 고집해온 어머니,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뇌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 감독은 안타까워한다. 어머니는 유기농을 고집하셨지만, 어머니의 주변 농장들로부터 날아온 GMO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또한 암은 어머니가 유기농 농사를 시작하기 이전 2~30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발병의 원인을 가질 수도 있음을. 지로 감독 어머니의 비극은 결국 우리는 그 누구도 GMO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른바 '대량생산'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종자라 선전해댔던 GMO 종자가 '자연의 위대한 저력'으로 인해 좌초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로 제초제 등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 저비용의 장점을 강조했던 GMO. 이른바 유전자조작을 통한 잡초 제거 프로그램은 유전자 조작조차 저항해내는 잡초와 병충해들로 인해 오히려 그 전보다 더 강력하고 많은 비료 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고비용'의 농산물이 되었음을 <조작된 밥상>은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GMO 농산물을 고집하는 측에서는 GMO 농산물이 다수의 인구를 기아로부터 구해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서 지로 감독의 어머니처럼 뒤뜰 식품점을 통해 '먹거리'를 생산해내는 소농이 세계적 생산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반전의 사실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10년의 기록, 빛나는 성취는 아니지만

제4회 서울국제음식영화제 상영작 <조작된 밥상> 스틸이미지

영화 속 지로 감독은 영화가 진행되는 그 10년 동안 꾸준히 캐나다 정부와 통화를 시도한다. 그 내용은 캐나다 정부에서 공인한 GMO에 대해 과연 책임감 있는 답변을 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한 이래 끝날 때까지 그 10년 동안 일관되게 캐나다 정부는 대답을 회피한다.

캐나다만이 아니다. 2016년 미국의 버몬트 주에서는 미국 내 최초로 GMO 라벨을 붙이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시민들이 깨어가는 과정만큼이나 몬산토 등 거대기업의 자본을 통한 로비는 치열하고 집요했다. 덕분에 우세하던 입장은 결국 거대기업이 장악한 미디어의 광고 등을 통해 매번 현혹되고 몇 년에 걸친 시도 끝에 어렵사리 민주주의적 성취를 이뤄냈다. 그러나 어둠의 힘은 결국 이 결정을 뒤집고 만다.

<조작된 밥상>이 귀결되는 곳은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이다. 제인 구달은 결국 이런 GMO의 문제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 즉 거대기업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정책, 돈의 논리에 따라 결정되는 국민의 생명권, 미래 세대를 고려치 않는 현실을 과연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거대기업의 이익을 대표하는 이들이 과연 우리의 대표자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10년을 경과하며 64개국에서 GMO 표시제가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버몬트 주의 결정이 뒤집혀 지듯이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아직 자신들이 먹는 먹거리의 실체를 알 수 없다.

또한 문화의 인간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것을 생산하자는 GMO 농산물의 수확이 과연 '인간적'이냐고 묻는다. 저비용도 아니고, 몇 가지의 획일적 품종 생산으로 다품종의 풍성한 농사체계를 망가뜨리고, 나아가 농촌 사회를 해체시키고, 유기농조차 여의치 않은 '금권'의 제국이 되어버린 전 세계의 GMO 생산 체제. 그곳에 ‘인간’이 낄 여지는 없다는 것을 발로 뛰는 취재를 통해 밝혀낸다.

감독이 영화를 완성하기 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의 딸처럼 커다란 안경을 쓰고 어린 딸들과 함께 유쾌하게 정원을 가꾸던 싱그러운 젊음의 어머니. 그 어머니는 결국 암으로, 사랑하던 자신의 정원을 떠났다. 그러나 어머니의 정원에서 키운 노란 완두콩으로 엄마의 레시피에 따라 만든 스프를 통해 어머니의 존재는 되살아나고, 어머니와 딸은 이어진다.

누구든 음식에 대해 알 권리가 있으며 이를 위해 기꺼이 싸워야 한다던 어머니 잘리 지로. 그녀의 유지는 아직 미완의 투쟁이지만 중단 없는 여정이었던 10년의 기록을 통해 '모전 여전'을 증명해낸다. <조작된 밥상>은 어머니와 딸의 중단 없는 싸움의 기록이자, 전 세계 GMO 반대 투쟁의 기록이다. 지난한 싸움은 이렇게 같은 곳을 바라본 모녀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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