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계속 하면서 만나는 교수들, 선생님들을 보며 느끼는 점은 학문을 익히고 그것을 전달하는 개인의 역량이 항상 균등하게 분배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지식과 연구 성과의 깊이가 엄청난 사람이 막상 강의 전달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고,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유능한 강의자도 실망스러운 저작 활동으로 얄팍한 실력이 들통 나기도 하죠. 이렇듯 실력과 경험이 많다고 해서 뛰어난 코치나 선생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 두 가지 활동이 필요로 하는 재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현역에서의 빛나는 경력이 한없이 기대치를 높이거나 특정한 편견을 만들어 또 다른 영역에서의 모습을 방해하는 경우도 많이 있구요.

화제의 프로그램. 슈퍼스타K 시즌 2에서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인 엄정화의 지금까지의 모습이 실망스럽고 아쉬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엄정화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과 후배들이 가지고 있는 존중, 존재감에 비해 그녀의 심사위원으로서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어요. 슈퍼위크를 지나, 두 번째 공개방송이 끝난 지금, 이제 후보자는 여섯 명밖에 남지 않았고, 개개인의 개성과 장단점이 모두 공개된 지금도, 정작 심사위원인 그녀가 왜 거기에 앉아 있는지, 어떤 역할을 수행하며 시청자와 참가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막 가수의 경력을 시작하는 이들을 평가할 자격이 있느냐의 다소 짓궂은 질문에서 엄정화는 쉽사리 부인할 수 없는 존재감을 뽐냅니다. 오랜 활동경력과 유능한 배우로서의 연기 활동 와중에도 여전히 다양한 뮤지션, 후배들과의 협업과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대를 지켜온 그녀는 모든 여자 댄스 가수들이 존경하는 선배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는 멋진 롤모델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가요계를 지배했던 여자 솔로가수의 계보를 따진다면 분명 그 가운데에는 엄정화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을 거에요. 그녀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 선배로서의 충고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슈퍼스타K가 심사위원으로서 그녀에게 기대했던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겠죠.

하지만 정작 방송에서의 그녀는 심사위원으로서 아무런 특색도, 차별성도, 설득력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보컬로서의 발성과 음색,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에 집중하는 이승철이나 본업인 작곡, 작사, 프로듀서까지 감당하는 뮤지션으로서 종합적이고 깐깐한 판단력을 자랑하는 윤종신에 비해 엄정화가 가진 색깔이 전혀 보이질 않아요. 그녀의 점수는 어떤 일관성도 찾아보기 힘들고 말하는 심사평은 기분이 좋았다, 느낌이 편했다, 행복했다는 식의 감상 위주의 말들뿐입니다. 그녀는 그런 개인적인 감상을 말해주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시청자들도, 제작진들도 가수 엄정화에게 기대하는 것은 심사위원 중 유일한 댄스가수로서의 노하우, 여성으로서의 감성,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한 선배로서 힘들게 꿈을 이어가고 있는 참가자들을 품어줄 수 있는 여유와 따스함이 아닐까요? 그렇지만 정작 그녀는 공개방송 첫 주에 춤과 댄스를 동시에 소화한 김소정과 이보람을 보호하거나 적절히 충고해주지 못했고, 반드시 그녀의 책임만은 아니지만 동적인 무대를 구성해줄 수 있었던 이들의 탈락은 남은 참가자들의 어정쩡한 댄스를 가미한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이번 주에도 약간의 춤을 가미했던 후보자들의 무대 구성이나 안무, 스타일,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그녀만이 할 수 있었을 댄스 가수로서의 세세한 지적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저 이번에도 역시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는 두루뭉술한 감상이 전부였죠.

그렇다고 냉철한 다른 두 사람에 비해 감성적이고 따스한 모습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슈퍼위크 최고의 화제녀였던 김보경의 탈락을 눈물로 안타까워했던 그녀의 감성은 이젠 도무지 보이질 않아요. 어린 친구들에게 상처입히고 싶지 않은 조심스러운 접근도 알겠지만 그들을 감싸안고 위로해주려면 이런 식의 소극적이고 특색없는 감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장점을 더욱 더 부각시켜주고 힘을 주는 표현을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오히려 이번 주 방송에서는 자신의 명곡들을 재현해준 후배들을 자상한 눈빛으로 보듬어 주었던 이문세의 넉넉함이 더 두드러졌었죠. 이래서야 굳이 그녀가 후보자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그들의 노래와 무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위치인 심사위원 중 한 사람으로 있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수로서의 엄정화는 놀라운 성공을 쌓아왔지만, 심사위원으로서의 그녀는 빵점에 가까워요.

엄청난 이슈와 인기만큼이나 슈퍼스타K2는 지적거리가 많은 프로그램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를 내세우며 감성을 자극하는 자극적인 편집, 곳곳에서 노골적으로 눈에 띄는 간접광고, 참가자들의 보호보다는 이상한 러브라인 조성 같은 이슈 만들기에만 집중하는 잔혹함 같이 거슬리는 문제점들이 하나둘이 아니죠.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참가자들의 능력을 평가하고 경쟁시키는 프로그램이기에 지금 이 프로그램에 가장 큰 문제점은 엄정화의 심사위원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걸고 죽을 각오로 무대를 준비해오는 참가자들만큼이나, 그녀도 그만큼의 마음가짐과 준비, 그리고 다소 모질지만 진심으로 그들에게 충고해주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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